창간호(2025.6.) l 퀴어 연구의 위치 l 기획 주제
앨라이로서 광장과 퀴어문화축제를 연구-생각하기
조수미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탄핵소추 1차 표결이 불발된 저녁. 아들과 나는 여의도 탄핵 집회에 있었다. 표결이 두 시간 넘게 늘어지면서 사람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국회 앞을 한 번만 둘러보고 가자고 앞으로 걸어 들어간 우리는, 개성과 재치가 넘치는 깃발들, 온갖 성소수자 깃발들을 지나쳐 케이팝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탄핵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퀴어문화축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엄마와 3년 차 퀴어문화축제 기획단 아들은 불이 밝혀진 국회의사당 건물 앞의 낯익고도 낯선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거 퀴퍼야?”
어리둥절도 잠시, 우리는 금세 퀴어퍼레이드를 따라가듯 뛰고 노래하고 소리쳤다. 들려오는 함성으로도 젊은 여성이 압도적 다수였지만, 알록달록 야광봉 사이에 밝기는 덜해도 질세라 전기 촛불을 흔들어대는 중년도 적지 않았다. 저건 NCT, 저건 라이즈, 엑소… 하면서 응원봉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던 아들은 최애 그룹 엔믹스의 응원봉을 사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플래시>의 리듬을 타며 “퇴~진 퇴진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젊은이들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로제의 <A.P.T.>의 가사를 몰라 웅얼거리면서도 덩실거리던 중년들은 윤수일의 <아파트>가 나오자 제 세상을 만난 듯 환성을 지르며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서른 살 차이의 엄마와 아들은 H.O.T.의, 아니 NCT의 <캔디>를 함께 불렀다. 그렇게 한참 분을 풀다 여의도역으로 샛강역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사람들은 구호를 외쳤다. 상황은 암울한데 기분은 암울하지 않았다. 퀴퍼뽕 같구만.
그 후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안 거리와 광장을 매주 응원봉과 케이팝, 온갖 정체성들을 드러내는 깃발로 채운 군중들은 마치 퀴퍼가 폭발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것 같았다. 응원봉의 주인으로 먼저 2030 여성들이 주목을 받았지만, 그 알록달록하고 뜨겁고 신나는 투지는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졌”(〈그림 1〉)다는, ‘나라 지키는 퀴어’들의 것이기도 했다. 이들의 경험은 케이팝 팬덤에서, 퀴어퍼레이드와 반성폭력 시위에서, 그리고 계엄 이전부터 삶을 옥죄어왔던 배제와 차별의 일상에서 겹치고 스쳐왔다. 매주 광화문 집회의 ‘페미존’에서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들은 만났다. 그리고 이들은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 앞에서, 전국 각지의 시위 현장에서 만나고 서로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농민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이주민에게 확장되었다.

〈그림 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선조실록』(휴머니스트, 2021)의 일부 장면을 한 트위터리안이 퀴어 문화의 기호를 활용하여 변형한 것으로, 본문에 언급된 ‘나라 지키는 퀴어’의 맥락에서 12‧3 계엄 전후 화제가 되었다. X에서 이미지의 원출처가 된 포스트를 찾지는 못했다.
허둥지둥 당근에서 응원봉을 구하고, 케이팝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는 시스젠더 헤테로 중년 지인들을 보고 ‘이태원 게이클럽에 갓 데뷔한 게이들 같다’고 놀렸다. 그리고 유쾌했다. 케이팝 놀이를 통해 함께 하는 감각을 느끼는 ‘우리’가 되는 것이고, 함께 하는 ‘놀이’ 속에 지금의 세상을 뒤집고 새로 올 세상을 꿈꾸는 의지가 빚어지는 것이니까. 주류사회의 시혜적인 시선이 뒤늦게 포착했을 뿐, 케이팝은 이미 거리에 있었고, 이미 정치적이었다. 퀴어도 아니면서 이런 핫한 트렌드를 먼저 알고 있었던 내가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사방팔방으로 폭발한 것은 퀴퍼만이 아니었다. 혐오도 폭발하며 확장했다. 서부지법 폭동을 보며 아침부터 12시간 가까이 반동성애 집단에게 둘러싸였던 2018년 인천퀴퍼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깃발을 부러뜨리고 퀴어들의 몸을 밀치고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조롱하던 사람들에게서 목격한 ‘공존의 여지가 없는, 상대방의 절멸을 원하는 듯한 눈빛’ (당시 필드 노트 기록)은 이제 페미니스트, 중국인, ‘빨갱이,’ 등 그들이 ‘반체제 세력’으로 규정한 모든 사람을 향했다.
광장의 시간이 대선의 시간에 밀려나면서, 각자 소수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을 외치던 이들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광장에 제일 먼저 달려 나온 2030 여성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여성정책과 차별금지법이 정책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혁명이 쿠데타 독재로 끝나는 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씁쓸한 전개를 떠올렸다. 2030 여성을 상찬하던 목소리는 숨어들고 퀴어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혐오의 발언으로 채우는 후보들의 싸움과 소셜 미디어에서 그 싸움을 증폭시키는 이들을 보면, 광장의 목소리가 꿈이었나, 지금이 악몽인가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연구를 하기 시작한 지 10년 가까이 된다. 2016년 우연한 기회에 성소수자 연구와 활동을 하는 연구자 선생님들을 만났다. 한국의 성소수자 혐오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학제적인 학술적 전문성으로 혐오에 제동을 걸자는 취지로 한국성소수자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맞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그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선보였다(이 책자의 개정증보판은 2019년에 창비에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로 출판되었다). 인류학자라는 이유로 축제를 한번 구경할 기회도 없이 초단기간의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장을 썼지만, 현장을 본 적도 없이 아는 척 글을 썼다는 것은 인류학자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실천적인 개입이 학술보다 앞서고, 집필이 연구를 앞서는 ‘퀴어 연구자’가 되었다.
나의 ‘소수자 연구’의 역사는 그것보다는 길다. 이전의 나는 일본의 소수민족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부식민지 성격을 띠는 오키나와에서 오사카에 이주한 이민자들의 거리에서,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가 한편에서는 오키나와인들의 저항과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고, 일본인에게는 ‘힐링의 섬’(癒しの島)에서 온 이국적인 상품처럼 소비되는 역설을 조사했다. 그 안에서 경험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부딪치고 스치면서 저항과 지배라는 이분법으로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에 시작된 민속춤 축제 ‘다이쇼 에이사 마츠리’는 공공장소에서 우렁찬 북소리와 박력 있는 춤사위, 낯선 전통 복장, 오키나와 방언으로 이루어진 낯선 선율의 민요로 ‘단일민족국가’ 신화가 지배하던 일본에서 ‘일본인과 다름’을 선언했다. 당장의 차별을 피하려 자신을 숨기고 더 큰 구조적인 억압을 견뎌왔던 선배 이민자들은 이들을 망신스럽다며 비난했다. 오키나와 판 커밍아웃, ‘우리가 여기에 있다’ 였던 셈이다. 그 십 년 가까이 지나 접한 퀴어문화축제는 새롭고도 익숙했다.
소수자성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 도일한 재일교포이셨다. 온갖 궂은일과 ‘조센징’의 멸시를 견디며 일본에 정착한 아버지가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사업가’로 칭송받으며 한편으로 ‘반쪽발이’라고 조롱을 받는 괴리, 냉전기 한일 양쪽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디아스포라의 긴장감. 일일이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아귀가 맞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감각은 체질처럼 몸 한구석에 남았다. 자신의 존재와 권리가 너무 당연한 사람들, 다른 삶의 자리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세상이 내어주지 않는 존재의 자리를 싸워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디아스포라를 보던 한국인의 시혜적인 시선에 반발하여 스스로를 ‘재일한인과 한국인의 혼혈’ 이라고 부르던 시절의 이질감이 일본의 오키나와 디아스포라 연구로, 한국의 퀴어 연구로 이어진 것이 나의 지극히 사적이면서 학술적이기도 한 관심의 궤적이다. 다만 성소수자 혐오(와 퀴어문화축제 방해)를 시대에 뒤떨어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1~2년쯤 조사해서 소논문 한두 편을 쓰고 원래 하던 연구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지. 조사하는 엄마를 따라 퀴어문화축제에 가던 초등학생 아들이 기획단 3년 차가 된 지금에 드는 생각이다.
응용인류학, 실천인류학, 공공인류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지만, 인류학의 지식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회참여적 전통이 있다. 미국 인류학의 시조로 간주되는 프란츠 보아즈와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 당시에 과학적 정설로 여겨지던 인종주의를 반박하고 흑인과 선주민의 삶을 드러내고,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틀을 제공하여 사회적 논쟁에서 기존의 이해를 변화시키고, 타인, 특히 연구 협력자들의 삶에 도움이 될 정치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 “특정한 삶의 영역에서의 부당하고 불의한 과정을 언급하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향해 그 조건들을 개선”하는 것이 비판적 민족지학의 윤리적 책무라고 한다면, 나의 연구는 초기 인류학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 안에 위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기독교 계열 대학의 계약직 교원인 외벌이 워킹맘의 현실은 그런 정의감과 자부심으로 버티기엔 상당히 취약하고 종종 비루하기도 했다. 고용안정을 확보한 동료 연구자가 성소수자 권리의 중요성이나 혐오의 문제점에 대해 공적으로 발언하고, 찬사나 공격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원래 테뉴어(정년 보장)가 단순히 교수를 게으르게 만드는 특권이 아니라, 실은 대학에서의 연구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강의에서 성소수자나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를 다룰 때 소수의 학생들이 민원을 넣어 도마에 오르지 않을까, 매 학기 긴장하고 학생들의 표정을 살핀다거나, 재계약 심사를 할 때 학술적 성과로 올라가 있는 연구나 저서가 재계약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지 두려워하게 될 때가 그렇다. 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은 괜한 걱정이라며 일축하지만, 지난 몇 년 성소수자를 옹호하다가 퇴학을 당하거나 파면을 당하고, 종교재판에 회부되거나 심지어 세상을 뜨기도 한 앨라이 종교인이나 연구자들을 보면,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학계에서는 종종 ‘재미있는’ ‘핫한’ ‘힙한’ 연구를 한다며 공치사를 연발하지만, 정작 채용의 순간에는 ‘너무 특이하고 지엽적인 연구’를 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 점점 늘어나는 성소수자 연구와 교육의 수요 때문에 학위논문 지도, 학술논문 심사, 특강 등의 봉사에 가까운 일회성의 청탁만이 늘어나서 소모되는 느낌이 들 때, 성소수자 연구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는 느낌이 들 때, 나 역시 ‘연관에 의한 낙인(stigma by association)’, 즉 낙인찍힌 존재 옆에서 함께 낙인이 찍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좀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연구와 교육을 하고 싶어 지원했던 비기독계 대학의 최종 면접에서 퀴어 연구에 대한 추궁 비슷한 질문을 받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견을 말해보라’는 사실상의 사상검증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말이다.
결국 연구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직장인으로서의 내적 갈등과 불안도 해소하지 못했고, 연구를 그만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이 꽤 흘렀다. ‘내가 철밥통이 없지 가오가 없나,’ 불안하고 자괴감이 생길 때마다 허세처럼 중얼거리긴 하지만, 그 ‘가오’의 정체는 뭘까.
한편으로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차별이 지속되며, 이제는 친구가 된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쌓이는 의무감과 부채감이 한 켠에는 있다.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반동성애 단체의 폭력을 함께 경험한 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 사회에서 애를 키우게 된 엄마로서, 이런 꼴을 보고, 애한테도 이런 꼴을 보이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2021년 조사 협력자이자 친구였던 퀴어 활동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 오사카의 게이 커뮤니티 연구에서 ‘상실과 애도의 공동체’로서 퀴어 공동체의 모습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썼던 나는 비당사자와 당사자의 경계를 다시 묻게 되었다. 본토와 다른 디아스포라의 종족성이 단순히 태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듯, 여성의 정체성이 생물학적 몸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듯, ‘퀴어함’의 당사자성 역시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뿐 아니라 공통의 경험, 함께 누리고 견디는 시간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퀴퍼뽕이든, 죽은 이에 대한 애도든.
퀴어문화축제에 함께 다니는 동안 애를 ‘위험한’ 곳에 데리고 다닌다고 걱정이나 에두른 비판 같은 말도 들은 적도 있다. ‘그런 데’ 데리고 다니면 애가 ‘게이’로 변할 위험이 있다는 뜻인지 반동성애 집회 때문에 위험하다는 뜻인지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뉘앙스는 아무래도 전자 같았지만……. 그런데 4년째 되던 2019년, 서울퀴퍼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애가 한 말이 있다. “한국에서 제일 멀쩡한 사람들이 퀴퍼에 와 있는 것 같아.” ‘퀴어’, ‘음란축제’와 “제일 멀쩡한 사람들”의 부조화가 하도 우스워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뭉클하기도 했다. 아이가 열 살에 한국에 와서 한국 사회의 획일적인 분위기에 숨 막혀하던 시절에 한 말이다. 다르게 생겨도, 다르게 생각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 나이며 성별이며 지위며 따지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곳. 일 년에 하루라도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고 자라면서 아이가 보호받았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 따라 퀴퍼에 가던 초등학생이 기획단 3년 차가 된 지금, 이상한 앨라이 모자로 우리는 각각 퀴어 판에 연루되어 있다.
나는 내 논문에 “퀴어문화축제에서 재현되는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상”이며, “종교적인 의례는 아니지만 ‘유토피아를 향해 열려 있는 삶’을 추구하고 ‘소망스러운 우주적인 사건(을) 재현’”한다고 썼다. 박사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비판적이되 유토피아를 꿈꾸라(Be critical, but utopian).” 비판연구를 하는 사람은 현실에서는 문제점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만, 자신이 꿈꾸는 세상 없이 비판만 계속해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퀴어문화축제에서도, 추운 겨울 광장에서도,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탄핵 이전이 아니라 탄핵 너머의 세상을 꿈꾸면서 춤을 추고 응원봉과 깃발을 흔든 게 아닌가.
대선 토론에서 상상을 초월한 성폭력 발언이 터져 나온 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겨울, 내란의 기억도 잊은 듯, 거리와 광장의 케이팝과 구호와 응원봉의 빛이 꿈이었던 듯이, 힘차게 나부끼던 수많은 깃발이 사라진 듯이, ‘탄핵 너머’를 꿈꾸던 이들의 열망 대신 ‘탄핵 이전’보다 못한 지리멸렬한 정치의 시간 속에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많은 분들이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기억이 꿈이 되지 않도록 집요하게 기록을 남기고 기억을 불러내어야 할 것 같다. 혹독한 겨울을 거리와 광장에서, 온라인으로 물자를 지원하고 응원을 보내며 분노와 환희로 함께 넘긴 서로 다르고 동시에 연결된 우리들의 기억을.
그리고, 단단하고 야무지게, 계속 꿈을 꾸자.
조수미
문화인류학자.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문화적 장에서 벌어지는 소수자 차별과 배제, 유희와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을 연구하고 있다. 공저서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성소수자 혐오를 넘어 인권의 확장으로』 (창비),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 페미니즘이 묻고 인류학이 답하다』 (서울대학교 출판부)가 있다.
이현화(2024), 「케이팝으로 함께 흐트러지기: 이태원 게이클럽의 케이팝 놀이가 만드는 공동체와 경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류학전공 석사학위청구논문.↩
조수미(2019), 「퀴어문화축제 공간의 상징과 의례」, 『한국문화인류학』, 52(3), 209-272.↩
조수미(2019), 「‘우리가 여기에 있다!’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 성소수자연구회 (편),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성소수자 혐오를 넘어 인권의 확장으로』, 서울: 창비, 270-280.↩
Cho, Sumi(2020), “‘Playing Okinawan’: A Search for Authenticity and the Power Asymmetry in Japanese Appropriation of Okinawan Folk Music,” Journal of Intercultural Studies, 41(3), 280-298.↩
Cho, Sumi(2023). “Eisā: Between the Expression of Okinawan Identity and the Appropriation of Okinawan Culture”. in H. Johnson (ed.), Handbook of Japanese Music in the Modern Era. Leiden: Brill. 85-100.↩
정병호(2017), 「기억과 추모의 공공인류학: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발굴과 귀환」, 『한국문화인류학』, 50(1), 3-46.↩
킹, 찰스(2024), 『문화의 수수께끼를 풀다: 문화 상대주의로 세상을 바꾼 인류학의 모험가들』, 문희경 역. 서울: 교양인.↩
Borofsky, R., and De Lauri, A.(2019),. "Public Anthropology in Changing Times," Public Anthropologist, 1(1), 6.↩
Madison, Soyini(2012), Critical Ethnography: Method, Ethics, and Performance, LA: Sage. ↩
Goldstein, S. B.(2017), "Stigma and Stigma by Association in Perceptions of Straight Allies," Journal of LGBT Youth, 14(4), 345-358.↩
조수미(2016), 「유희를 통한 정치적 실천과 성소수자 집단정체성의 변화: 오사카(大阪)의 한 오키나와(沖縄) 전통무용 동호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아태연구』, 23(1), 175-215. ↩
류정아(2011), 「공연예술축제를 구성하는 ‘예술성’과 ‘축제성’의 특성 분석: 아비뇽 페스티벌의 사례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2, 253-285; 조수미(2019), 「퀴어문화축제 공간의 상징과 의례」, 『한국문화인류학』, 52(3), 261쪽에서 재인용.↩
하위징아, 요한(2018),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이종인(역), 서울: 연암서가; 조수미(2019)에서재인용.↩
창간호(2025.6.) l 퀴어 연구의 위치 l 기획 주제
앨라이로서 광장과 퀴어문화축제를 연구-생각하기
조수미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탄핵소추 1차 표결이 불발된 저녁. 아들과 나는 여의도 탄핵 집회에 있었다. 표결이 두 시간 넘게 늘어지면서 사람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국회 앞을 한 번만 둘러보고 가자고 앞으로 걸어 들어간 우리는, 개성과 재치가 넘치는 깃발들, 온갖 성소수자 깃발들을 지나쳐 케이팝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탄핵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퀴어문화축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엄마와 3년 차 퀴어문화축제 기획단 아들은 불이 밝혀진 국회의사당 건물 앞의 낯익고도 낯선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거 퀴퍼야?”
어리둥절도 잠시, 우리는 금세 퀴어퍼레이드를 따라가듯 뛰고 노래하고 소리쳤다. 들려오는 함성으로도 젊은 여성이 압도적 다수였지만, 알록달록 야광봉 사이에 밝기는 덜해도 질세라 전기 촛불을 흔들어대는 중년도 적지 않았다. 저건 NCT, 저건 라이즈, 엑소… 하면서 응원봉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던 아들은 최애 그룹 엔믹스의 응원봉을 사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플래시>의 리듬을 타며 “퇴~진 퇴진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젊은이들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로제의 <A.P.T.>의 가사를 몰라 웅얼거리면서도 덩실거리던 중년들은 윤수일의 <아파트>가 나오자 제 세상을 만난 듯 환성을 지르며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서른 살 차이의 엄마와 아들은 H.O.T.의, 아니 NCT의 <캔디>를 함께 불렀다. 그렇게 한참 분을 풀다 여의도역으로 샛강역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사람들은 구호를 외쳤다. 상황은 암울한데 기분은 암울하지 않았다. 퀴퍼뽕 같구만.
그 후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안 거리와 광장을 매주 응원봉과 케이팝, 온갖 정체성들을 드러내는 깃발로 채운 군중들은 마치 퀴퍼가 폭발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것 같았다. 응원봉의 주인으로 먼저 2030 여성들이 주목을 받았지만, 그 알록달록하고 뜨겁고 신나는 투지는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졌”(〈그림 1〉)다는, ‘나라 지키는 퀴어’들의 것이기도 했다. 이들의 경험은 케이팝 팬덤에서, 퀴어퍼레이드와 반성폭력 시위에서, 그리고 계엄 이전부터 삶을 옥죄어왔던 배제와 차별의 일상에서 겹치고 스쳐왔다. 매주 광화문 집회의 ‘페미존’에서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들은 만났다. 그리고 이들은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 앞에서, 전국 각지의 시위 현장에서 만나고 서로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농민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이주민에게 확장되었다.
〈그림 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선조실록』(휴머니스트, 2021)의 일부 장면을 한 트위터리안이 퀴어 문화의 기호를 활용하여 변형한 것으로, 본문에 언급된 ‘나라 지키는 퀴어’의 맥락에서 12‧3 계엄 전후 화제가 되었다. X에서 이미지의 원출처가 된 포스트를 찾지는 못했다.
허둥지둥 당근에서 응원봉을 구하고, 케이팝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는 시스젠더 헤테로 중년 지인들을 보고 ‘이태원 게이클럽에 갓 데뷔한 게이들 같다’고 놀렸다. 그리고 유쾌했다. 케이팝 놀이를 통해 함께 하는 감각을 느끼는 ‘우리’가 되는 것이고1, 함께 하는 ‘놀이’ 속에 지금의 세상을 뒤집고 새로 올 세상을 꿈꾸는 의지가 빚어지는 것이니까.2 주류사회의 시혜적인 시선이 뒤늦게 포착했을 뿐, 케이팝은 이미 거리에 있었고, 이미 정치적이었다. 퀴어도 아니면서 이런 핫한 트렌드를 먼저 알고 있었던 내가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사방팔방으로 폭발한 것은 퀴퍼만이 아니었다. 혐오도 폭발하며 확장했다. 서부지법 폭동을 보며 아침부터 12시간 가까이 반동성애 집단에게 둘러싸였던 2018년 인천퀴퍼의 악몽이 되살아났다.3 어두운 뒷골목에서 깃발을 부러뜨리고 퀴어들의 몸을 밀치고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조롱하던 사람들에게서 목격한 ‘공존의 여지가 없는, 상대방의 절멸을 원하는 듯한 눈빛’ (당시 필드 노트 기록)은 이제 페미니스트, 중국인, ‘빨갱이,’ 등 그들이 ‘반체제 세력’으로 규정한 모든 사람을 향했다.
광장의 시간이 대선의 시간에 밀려나면서, 각자 소수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을 외치던 이들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광장에 제일 먼저 달려 나온 2030 여성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여성정책과 차별금지법이 정책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혁명이 쿠데타 독재로 끝나는 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씁쓸한 전개를 떠올렸다. 2030 여성을 상찬하던 목소리는 숨어들고 퀴어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혐오의 발언으로 채우는 후보들의 싸움과 소셜 미디어에서 그 싸움을 증폭시키는 이들을 보면, 광장의 목소리가 꿈이었나, 지금이 악몽인가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연구를 하기 시작한 지 10년 가까이 된다. 2016년 우연한 기회에 성소수자 연구와 활동을 하는 연구자 선생님들을 만났다. 한국의 성소수자 혐오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학제적인 학술적 전문성으로 혐오에 제동을 걸자는 취지로 한국성소수자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맞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그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선보였다(이 책자의 개정증보판은 2019년에 창비에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로 출판되었다). 인류학자라는 이유로 축제를 한번 구경할 기회도 없이 초단기간의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장을 썼지만, 현장을 본 적도 없이 아는 척 글을 썼다는 것은 인류학자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실천적인 개입이 학술보다 앞서고, 집필이 연구를 앞서는 ‘퀴어 연구자’가 되었다.
나의 ‘소수자 연구’의 역사는 그것보다는 길다. 이전의 나는 일본의 소수민족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부식민지 성격을 띠는 오키나와에서 오사카에 이주한 이민자들의 거리에서,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가 한편에서는 오키나와인들의 저항과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고, 일본인에게는 ‘힐링의 섬’(癒しの島)에서 온 이국적인 상품처럼 소비되는 역설4을 조사했다. 그 안에서 경험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부딪치고 스치면서 저항과 지배라는 이분법으로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에 시작된 민속춤 축제 ‘다이쇼 에이사 마츠리’는 공공장소에서 우렁찬 북소리와 박력 있는 춤사위, 낯선 전통 복장, 오키나와 방언으로 이루어진 낯선 선율의 민요로 ‘단일민족국가’ 신화가 지배하던 일본에서 ‘일본인과 다름’을 선언했다.5 당장의 차별을 피하려 자신을 숨기고 더 큰 구조적인 억압을 견뎌왔던 선배 이민자들은 이들을 망신스럽다며 비난했다. 오키나와 판 커밍아웃, ‘우리가 여기에 있다’ 였던 셈이다. 그 십 년 가까이 지나 접한 퀴어문화축제는 새롭고도 익숙했다.
소수자성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 도일한 재일교포이셨다. 온갖 궂은일과 ‘조센징’의 멸시를 견디며 일본에 정착한 아버지가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사업가’로 칭송받으며 한편으로 ‘반쪽발이’라고 조롱을 받는 괴리, 냉전기 한일 양쪽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디아스포라의 긴장감. 일일이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아귀가 맞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감각은 체질처럼 몸 한구석에 남았다. 자신의 존재와 권리가 너무 당연한 사람들, 다른 삶의 자리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세상이 내어주지 않는 존재의 자리를 싸워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디아스포라를 보던 한국인의 시혜적인 시선에 반발하여 스스로를 ‘재일한인과 한국인의 혼혈’ 이라고 부르던 시절의 이질감이 일본의 오키나와 디아스포라 연구로, 한국의 퀴어 연구로 이어진 것이 나의 지극히 사적이면서 학술적이기도 한 관심의 궤적이다. 다만 성소수자 혐오(와 퀴어문화축제 방해)를 시대에 뒤떨어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1~2년쯤 조사해서 소논문 한두 편을 쓰고 원래 하던 연구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지. 조사하는 엄마를 따라 퀴어문화축제에 가던 초등학생 아들이 기획단 3년 차가 된 지금에 드는 생각이다.
응용인류학, 실천인류학, 공공인류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지만, 인류학의 지식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회참여적 전통이 있다.6 미국 인류학의 시조로 간주되는 프란츠 보아즈와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 당시에 과학적 정설로 여겨지던 인종주의를 반박하고 흑인과 선주민의 삶을 드러내고,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하는데 열정을 쏟았다.7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틀을 제공하여 사회적 논쟁에서 기존의 이해를 변화시키고, 타인, 특히 연구 협력자들의 삶에 도움이 될 정치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8, “특정한 삶의 영역에서의 부당하고 불의한 과정을 언급하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향해 그 조건들을 개선”9하는 것이 비판적 민족지학의 윤리적 책무라고 한다면, 나의 연구는 초기 인류학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 안에 위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기독교 계열 대학의 계약직 교원인 외벌이 워킹맘의 현실은 그런 정의감과 자부심으로 버티기엔 상당히 취약하고 종종 비루하기도 했다. 고용안정을 확보한 동료 연구자가 성소수자 권리의 중요성이나 혐오의 문제점에 대해 공적으로 발언하고, 찬사나 공격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원래 테뉴어(정년 보장)가 단순히 교수를 게으르게 만드는 특권이 아니라, 실은 대학에서의 연구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강의에서 성소수자나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를 다룰 때 소수의 학생들이 민원을 넣어 도마에 오르지 않을까, 매 학기 긴장하고 학생들의 표정을 살핀다거나, 재계약 심사를 할 때 학술적 성과로 올라가 있는 연구나 저서가 재계약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지 두려워하게 될 때가 그렇다. 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은 괜한 걱정이라며 일축하지만, 지난 몇 년 성소수자를 옹호하다가 퇴학을 당하거나 파면을 당하고, 종교재판에 회부되거나 심지어 세상을 뜨기도 한 앨라이 종교인이나 연구자들을 보면,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학계에서는 종종 ‘재미있는’ ‘핫한’ ‘힙한’ 연구를 한다며 공치사를 연발하지만, 정작 채용의 순간에는 ‘너무 특이하고 지엽적인 연구’를 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 점점 늘어나는 성소수자 연구와 교육의 수요 때문에 학위논문 지도, 학술논문 심사, 특강 등의 봉사에 가까운 일회성의 청탁만이 늘어나서 소모되는 느낌이 들 때, 성소수자 연구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는 느낌이 들 때, 나 역시 ‘연관에 의한 낙인(stigma by association)’10, 즉 낙인찍힌 존재 옆에서 함께 낙인이 찍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좀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연구와 교육을 하고 싶어 지원했던 비기독계 대학의 최종 면접에서 퀴어 연구에 대한 추궁 비슷한 질문을 받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견을 말해보라’는 사실상의 사상검증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말이다.
결국 연구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직장인으로서의 내적 갈등과 불안도 해소하지 못했고, 연구를 그만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이 꽤 흘렀다. ‘내가 철밥통이 없지 가오가 없나,’ 불안하고 자괴감이 생길 때마다 허세처럼 중얼거리긴 하지만, 그 ‘가오’의 정체는 뭘까.
한편으로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차별이 지속되며, 이제는 친구가 된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쌓이는 의무감과 부채감이 한 켠에는 있다.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반동성애 단체의 폭력을 함께 경험한 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 사회에서 애를 키우게 된 엄마로서, 이런 꼴을 보고, 애한테도 이런 꼴을 보이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2021년 조사 협력자이자 친구였던 퀴어 활동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 오사카의 게이 커뮤니티 연구에서 ‘상실과 애도의 공동체’로서 퀴어 공동체의 모습11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썼던 나는 비당사자와 당사자의 경계를 다시 묻게 되었다. 본토와 다른 디아스포라의 종족성이 단순히 태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듯, 여성의 정체성이 생물학적 몸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듯, ‘퀴어함’의 당사자성 역시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뿐 아니라 공통의 경험, 함께 누리고 견디는 시간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퀴퍼뽕이든, 죽은 이에 대한 애도든.
퀴어문화축제에 함께 다니는 동안 애를 ‘위험한’ 곳에 데리고 다닌다고 걱정이나 에두른 비판 같은 말도 들은 적도 있다. ‘그런 데’ 데리고 다니면 애가 ‘게이’로 변할 위험이 있다는 뜻인지 반동성애 집회 때문에 위험하다는 뜻인지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뉘앙스는 아무래도 전자 같았지만……. 그런데 4년째 되던 2019년, 서울퀴퍼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애가 한 말이 있다. “한국에서 제일 멀쩡한 사람들이 퀴퍼에 와 있는 것 같아.” ‘퀴어’, ‘음란축제’와 “제일 멀쩡한 사람들”의 부조화가 하도 우스워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뭉클하기도 했다. 아이가 열 살에 한국에 와서 한국 사회의 획일적인 분위기에 숨 막혀하던 시절에 한 말이다. 다르게 생겨도, 다르게 생각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 나이며 성별이며 지위며 따지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곳. 일 년에 하루라도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고 자라면서 아이가 보호받았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 따라 퀴퍼에 가던 초등학생이 기획단 3년 차가 된 지금, 이상한 앨라이 모자로 우리는 각각 퀴어 판에 연루되어 있다.
나는 내 논문에 “퀴어문화축제에서 재현되는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상”이며, “종교적인 의례는 아니지만 ‘유토피아를 향해 열려 있는 삶’12을 추구하고 ‘소망스러운 우주적인 사건(을) 재현’”13한다고 썼다. 박사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비판적이되 유토피아를 꿈꾸라(Be critical, but utopian).” 비판연구를 하는 사람은 현실에서는 문제점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만, 자신이 꿈꾸는 세상 없이 비판만 계속해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퀴어문화축제에서도, 추운 겨울 광장에서도,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탄핵 이전이 아니라 탄핵 너머의 세상을 꿈꾸면서 춤을 추고 응원봉과 깃발을 흔든 게 아닌가.
대선 토론에서 상상을 초월한 성폭력 발언이 터져 나온 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겨울, 내란의 기억도 잊은 듯, 거리와 광장의 케이팝과 구호와 응원봉의 빛이 꿈이었던 듯이, 힘차게 나부끼던 수많은 깃발이 사라진 듯이, ‘탄핵 너머’를 꿈꾸던 이들의 열망 대신 ‘탄핵 이전’보다 못한 지리멸렬한 정치의 시간 속에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많은 분들이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기억이 꿈이 되지 않도록 집요하게 기록을 남기고 기억을 불러내어야 할 것 같다. 혹독한 겨울을 거리와 광장에서, 온라인으로 물자를 지원하고 응원을 보내며 분노와 환희로 함께 넘긴 서로 다르고 동시에 연결된 우리들의 기억을.
그리고, 단단하고 야무지게, 계속 꿈을 꾸자.
조수미
문화인류학자.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문화적 장에서 벌어지는 소수자 차별과 배제, 유희와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을 연구하고 있다. 공저서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성소수자 혐오를 넘어 인권의 확장으로』 (창비),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 페미니즘이 묻고 인류학이 답하다』 (서울대학교 출판부)가 있다.
이현화(2024), 「케이팝으로 함께 흐트러지기: 이태원 게이클럽의 케이팝 놀이가 만드는 공동체와 경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류학전공 석사학위청구논문.↩
조수미(2019), 「퀴어문화축제 공간의 상징과 의례」, 『한국문화인류학』, 52(3), 209-272.↩
조수미(2019), 「‘우리가 여기에 있다!’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 성소수자연구회 (편),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성소수자 혐오를 넘어 인권의 확장으로』, 서울: 창비, 270-280.↩
Cho, Sumi(2020), “‘Playing Okinawan’: A Search for Authenticity and the Power Asymmetry in Japanese Appropriation of Okinawan Folk Music,” Journal of Intercultural Studies, 41(3), 280-298.↩
Cho, Sumi(2023). “Eisā: Between the Expression of Okinawan Identity and the Appropriation of Okinawan Culture”. in H. Johnson (ed.), Handbook of Japanese Music in the Modern Era. Leiden: Brill. 85-100.↩
정병호(2017), 「기억과 추모의 공공인류학: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발굴과 귀환」, 『한국문화인류학』, 50(1), 3-46.↩
킹, 찰스(2024), 『문화의 수수께끼를 풀다: 문화 상대주의로 세상을 바꾼 인류학의 모험가들』, 문희경 역. 서울: 교양인.↩
Borofsky, R., and De Lauri, A.(2019),. "Public Anthropology in Changing Times," Public Anthropologist, 1(1), 6.↩
Madison, Soyini(2012), Critical Ethnography: Method, Ethics, and Performance, LA: Sage. ↩
Goldstein, S. B.(2017), "Stigma and Stigma by Association in Perceptions of Straight Allies," Journal of LGBT Youth, 14(4), 345-358.↩
조수미(2016), 「유희를 통한 정치적 실천과 성소수자 집단정체성의 변화: 오사카(大阪)의 한 오키나와(沖縄) 전통무용 동호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아태연구』, 23(1), 175-215. ↩
류정아(2011), 「공연예술축제를 구성하는 ‘예술성’과 ‘축제성’의 특성 분석: 아비뇽 페스티벌의 사례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2, 253-285; 조수미(2019), 「퀴어문화축제 공간의 상징과 의례」, 『한국문화인류학』, 52(3), 261쪽에서 재인용.↩
하위징아, 요한(2018),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이종인(역), 서울: 연암서가; 조수미(2019)에서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