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2025.9.) l 성소수자/퀴어 연구의 방법 l 신진연구
어떻게 논바이너리 젠더 이론에 가닿을 수 있을까?
「젠더비평으로서 트랜스」 (2025)
양준호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나는 태어날 때 의사와 국가에 의해 지정된 성별과 불화를 겪으며 살아가지만, 그 불화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며 살지는 않는다. 트랜스젠더를 ‘진정한 내면에 맞춰 외면을 바꾸려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외양을 바꿔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내키지 않는 마음 사이에 끼인 채 살아왔다. 겉모습을 소위 ‘여성적’으로 고치지 않는 것이 내가 스스로를 여성에 동일시하는 여러 경로 중 하나라고 깨닫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이에 끼인 감각은 규범적인 트랜스젠더 서사로는 잡히지 않던 내 삶을 설명하는 데 중요했고,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트랜스성을 포착할 비이원론적인 젠더 이론은 무엇일지 점차 고민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젠더는 종종 인간을 남성과 여성 두 집단으로 나누어 서로에게 다른 세계를 할당하는 거시사회학적인 권력 구조로 이해된다. 이는 실제로 젠더가 작동하는 한 양상을 잘 포착하여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있는 젠더의 인식가능성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존재는 사회적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한다는 사실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젠더는 이분법적 체계 외의 자리는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체계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젠더가 선행하는 권력을 반복해서 인용하고 모방하기만 하는 자기동일적 체계로만 이해된다면, 이원론 바깥에서 삶을 길어내려는 트랜스 삶을 설명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젠더 이론 안에서 트랜스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젠더가 모든 것을 이분법 안으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규범임과 동시에, 그런 규범에 저항하고 이분법을 재배치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역설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199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출현한 트랜스 담론이 젠더 개념을 어떻게 새롭게 이해해 왔는지를 다시 되돌아봄으로써 ‘트랜스’를 단지 특정 인구 집단에 붙는 이름표가 아니라, 젠더 개념을 가로질러 쇄신하는 ‘비평’의 정신으로 역사화하고자 했다. 트랜스를 하나의 인구군에 귀속되는 정체성으로 이해하게 되면, 인구의 평균을 측정하고 계산하고 평가하는 생명정치적 규범화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특히, 주민등록제도와 병역제도를 통해 인구를 국가 차원에서 둘로 나누어 관리하는 한국은 트랜스젠더를 ‘성전환 수술을 통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려는 욕구가 있는 인구 집단’으로 규범화하여 전체 이원론적 인구 관리 체계 속에 이들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그 통치성을 유지 및 보완해 왔다. 트랜스가 점차 이원론적 인구 통치술에 포섭되어 가는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그런 통치에 다 장악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읽어낼 정치적 관점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트랜스를 인구화에 저항하는 비평으로 사고할 이론적 입지가 마련되어야 한다.
특히, 샌디 스톤(Sandy Stone)에서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로 이어지는 트랜스 담론의 계보는 트랜스를 동시대 비평 이론의 자장 속에 녹여내며, 트랜스를 하나의 인구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비평적 태도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바꿔 나간다. 이들의 글쓰기는 이원론적으로 구조화된 젠더 체계를 살아가는 주체의 감각과 체험의 차원에 집중하면서, 젠더화가 단지 주어진 동일시 대상을 기계적으로 모방함으로써 완수되는 과업이 아니라 모순과 불일치, 혼란과 환상, 우울과 만족, 역설과 회복으로 가득 찬 여러 겹의 정동적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두터운 동일시의 과정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안팎으로 수많은 차이와 갈등을 교섭하며 생존한다. 주체는 젠더화 과정 속에서 복잡한 동일시 기제를 통과하며 예기치 못한 감정의 투여와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런 주체화의 정동적 양식이 젠더 규범에 의해 강제된 동일시 대상을 수선하고 재조립하는 탈동일시를 수행할 수 있게 만든다.
트랜스 담론은 젠더를 단지 여성성과 남성성의 강제적 권력으로만 이해하길 거부하고, 주어진 남자와 여자의 인구학적 분할선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견디고 애착하는 정동적 과정으로 확장하면서 젠더 이론을 쇄신한다. 중요한 것은 젠더화 과정이 강제하는 예속화에서 벗어나는지 순응하는지가 아니라, 주체가 그런 저항과 순응의 손쉬운 이분법으로 다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존 가능성을 회복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예속화 속에서 형성할 수 있는 관계성과 애착을 통해 주체는 주어진 삶의 배치를 재배열하는 비평의 역량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는 주체화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과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함으로써 젠더화된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충한다.
논문을 쓰면서 내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말하자면 “해석의 자유”였다. 젠더는 기본적으로 몸의 표면에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단서들을 읽어 나가는 해석 작용을 동반한다. 젠더 이원론은 그런 독해가 특정 방향으로 수렴하도록 우리의 감각 기관을 계속해서 관리하고 단속한다. 내가 트랜스를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의미는 삶이라는 게 불투명한 것이어서,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살아지지 않는 순간들을 두루 갖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관심사는 젠더화된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복잡한 찰나의 순간들을 붙잡아 읽어내는 데 있었고, ‘트랜스’는 그 순간들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정동적 독해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젠더화된 삶의 자유가 여성성을 초월하는 공정을 추구하는 것, 유리천장을 뚫고 사회적 성공이라는 야망을 달성하는 것, 온전하고 충만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제한되는 현실 속에서 해석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이때의 자유는 모든 것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유아독존의 움직임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본질적인 기원도 나아가야 할 정해진 목적지도 없다는 씁쓸한 사실 속에서 맛보는 자유다. 미리 정해진 것이 없기에, 주체는 해석의 진위나 효력과는 상관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실을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다. 가령, 아무런 외적 증거 없이도 누군가가 “나는 여자예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 이 취약한 말하기의 순간이 단순한 허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혼란 속에 빠트리는 발화 실천으로 읽힐 수 있을 때, 우리는 트랜스가 제시하는 젠더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양준호
퀴어, 트랜스, 정동 이론을 공부하면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화된 삶을 읽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상처를 극복하려 들지 않고 손상과 함께 일상을 사는 주체를 그리는 데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트라우마, 회복, 상상력을 키워드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2호(2025.9.) l 성소수자/퀴어 연구의 방법 l 신진연구
어떻게 논바이너리 젠더 이론에 가닿을 수 있을까?
「젠더비평으로서 트랜스」 (2025)
양준호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나는 태어날 때 의사와 국가에 의해 지정된 성별과 불화를 겪으며 살아가지만, 그 불화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며 살지는 않는다. 트랜스젠더를 ‘진정한 내면에 맞춰 외면을 바꾸려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외양을 바꿔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내키지 않는 마음 사이에 끼인 채 살아왔다. 겉모습을 소위 ‘여성적’으로 고치지 않는 것이 내가 스스로를 여성에 동일시하는 여러 경로 중 하나라고 깨닫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이에 끼인 감각은 규범적인 트랜스젠더 서사로는 잡히지 않던 내 삶을 설명하는 데 중요했고,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트랜스성을 포착할 비이원론적인 젠더 이론은 무엇일지 점차 고민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젠더는 종종 인간을 남성과 여성 두 집단으로 나누어 서로에게 다른 세계를 할당하는 거시사회학적인 권력 구조로 이해된다. 이는 실제로 젠더가 작동하는 한 양상을 잘 포착하여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있는 젠더의 인식가능성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존재는 사회적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한다는 사실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젠더는 이분법적 체계 외의 자리는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체계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젠더가 선행하는 권력을 반복해서 인용하고 모방하기만 하는 자기동일적 체계로만 이해된다면, 이원론 바깥에서 삶을 길어내려는 트랜스 삶을 설명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젠더 이론 안에서 트랜스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젠더가 모든 것을 이분법 안으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규범임과 동시에, 그런 규범에 저항하고 이분법을 재배치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역설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199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출현한 트랜스 담론이 젠더 개념을 어떻게 새롭게 이해해 왔는지를 다시 되돌아봄으로써 ‘트랜스’를 단지 특정 인구 집단에 붙는 이름표가 아니라, 젠더 개념을 가로질러 쇄신하는 ‘비평’의 정신으로 역사화하고자 했다. 트랜스를 하나의 인구군에 귀속되는 정체성으로 이해하게 되면, 인구의 평균을 측정하고 계산하고 평가하는 생명정치적 규범화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특히, 주민등록제도와 병역제도를 통해 인구를 국가 차원에서 둘로 나누어 관리하는 한국은 트랜스젠더를 ‘성전환 수술을 통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려는 욕구가 있는 인구 집단’으로 규범화하여 전체 이원론적 인구 관리 체계 속에 이들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그 통치성을 유지 및 보완해 왔다. 트랜스가 점차 이원론적 인구 통치술에 포섭되어 가는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그런 통치에 다 장악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읽어낼 정치적 관점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트랜스를 인구화에 저항하는 비평으로 사고할 이론적 입지가 마련되어야 한다.
특히, 샌디 스톤(Sandy Stone)에서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로 이어지는 트랜스 담론의 계보는 트랜스를 동시대 비평 이론의 자장 속에 녹여내며, 트랜스를 하나의 인구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비평적 태도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바꿔 나간다. 이들의 글쓰기는 이원론적으로 구조화된 젠더 체계를 살아가는 주체의 감각과 체험의 차원에 집중하면서, 젠더화가 단지 주어진 동일시 대상을 기계적으로 모방함으로써 완수되는 과업이 아니라 모순과 불일치, 혼란과 환상, 우울과 만족, 역설과 회복으로 가득 찬 여러 겹의 정동적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두터운 동일시의 과정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안팎으로 수많은 차이와 갈등을 교섭하며 생존한다. 주체는 젠더화 과정 속에서 복잡한 동일시 기제를 통과하며 예기치 못한 감정의 투여와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런 주체화의 정동적 양식이 젠더 규범에 의해 강제된 동일시 대상을 수선하고 재조립하는 탈동일시를 수행할 수 있게 만든다.
트랜스 담론은 젠더를 단지 여성성과 남성성의 강제적 권력으로만 이해하길 거부하고, 주어진 남자와 여자의 인구학적 분할선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견디고 애착하는 정동적 과정으로 확장하면서 젠더 이론을 쇄신한다. 중요한 것은 젠더화 과정이 강제하는 예속화에서 벗어나는지 순응하는지가 아니라, 주체가 그런 저항과 순응의 손쉬운 이분법으로 다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존 가능성을 회복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예속화 속에서 형성할 수 있는 관계성과 애착을 통해 주체는 주어진 삶의 배치를 재배열하는 비평의 역량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는 주체화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과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함으로써 젠더화된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충한다.
논문을 쓰면서 내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말하자면 “해석의 자유”였다. 젠더는 기본적으로 몸의 표면에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단서들을 읽어 나가는 해석 작용을 동반한다. 젠더 이원론은 그런 독해가 특정 방향으로 수렴하도록 우리의 감각 기관을 계속해서 관리하고 단속한다. 내가 트랜스를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의미는 삶이라는 게 불투명한 것이어서,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살아지지 않는 순간들을 두루 갖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관심사는 젠더화된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복잡한 찰나의 순간들을 붙잡아 읽어내는 데 있었고, ‘트랜스’는 그 순간들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정동적 독해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젠더화된 삶의 자유가 여성성을 초월하는 공정을 추구하는 것, 유리천장을 뚫고 사회적 성공이라는 야망을 달성하는 것, 온전하고 충만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제한되는 현실 속에서 해석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이때의 자유는 모든 것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유아독존의 움직임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본질적인 기원도 나아가야 할 정해진 목적지도 없다는 씁쓸한 사실 속에서 맛보는 자유다. 미리 정해진 것이 없기에, 주체는 해석의 진위나 효력과는 상관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실을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다. 가령, 아무런 외적 증거 없이도 누군가가 “나는 여자예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 이 취약한 말하기의 순간이 단순한 허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혼란 속에 빠트리는 발화 실천으로 읽힐 수 있을 때, 우리는 트랜스가 제시하는 젠더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양준호
퀴어, 트랜스, 정동 이론을 공부하면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화된 삶을 읽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상처를 극복하려 들지 않고 손상과 함께 일상을 사는 주체를 그리는 데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트라우마, 회복, 상상력을 키워드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