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2025.12.) l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 l 신진연구
윤리의 기술(伎術), 기술(記述)의 윤리
「HIV/AIDS 감염인 커뮤니티의 자조 돌봄 사례연구」 (2025)
최정빈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학술문’과 ‘르포르타주(reportage)’는 준별되어야 하는가?
웹진 『도착』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은 뒤, 학위 과정 내내 끈질기게 붙들었던 ‘연구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물음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나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의 HIV/AIDS 감염인 커뮤니티가 낙인과 공적 돌봄 체계의 공백 속에서 스스로 구축한 자조 돌봄 사례를 질적으로 탐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가 전공한 보건학은 실용적 학문이자, 다학제적 학문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적극적으로 표방한다. 연구 과정에서 나는, 이 학문이 표방하는 정체성이 ‘연구의 결과는 마땅히 실용적이어야만 한다’는 차갑고 거친 정언명령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여러 영역으로 구획된 접근법과는 무관하게, 연구라는 과업은 특정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의 역사에 놓인 사건을 포착하고, 그것에 얽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감각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도출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성된 누군가의 이야기가 공통의 공간과 환경을 공유하는 특정 집단의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타자에게까지 가닿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글쓰기를 통해 한데 모아내는 작업이 필연적이다. 요컨대, 연구란 글쓰기를 통해 세계에 말을 건네는 행위이자 연구자가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미묘한 길항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스스로의 언어를 구축해 나가는 기술(記述)행위의 총체이기도 하다.
하나, 문제는 보건학의 문법이 내가 마주한 삶의 현장과 곧바로 접속하지 않는 데 있었다. 내가 목도한 감염인들의 삶은 통계와 일반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보건학의 주류적 언어로 쉽게 포섭될 수 없는 지극히 내밀한 개인의 서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내게 있어 이것을 기술하는 과정은 ‘르포르타주’와 고정된 형식 안에서 엄밀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보건학적 학술문’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었다. 연구 과정에서 특정한 글쓰기의 형식—여기서 글쓰기의 형식은 방법론적 엄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술문의 서식을 의미한다—이 부분적으로 차용될 수는 있으나, 고정된 형식이 강요될 이유는 없다. 다학제적 학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보건학이 스스로 독자적인 외연을 구축하기 위한 접근이 기술 방식, 즉 서식의 정형화라면 이는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아울러, 현상에 대한 기술은 ‘번역 행위’이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실은 연구자와 연구 대상자라는 두 세계와 두 문화 간의 충돌에서 비롯하기에 그 자체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질적연구자가 기술 과정에서 객관성을 잃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애초에 요점을 벗어난 것이어서, 당시에 나는 때때로 보건학이 어떤 멍에처럼 느껴져 억하심정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얼마간 사회학이나 인류학에 눈길을 돌려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고도로 훈련된 주관성이라는 주장들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반추해 보면 나는 보건학의 정석에서 조금 빗겨 있는 이단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어떤 종류의 어긋남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연구적 실천은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계속해서 묻고 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내가 배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의 기술(伎術)이라고 생각했다.
윤리의 기술(伎術), 기술(記述)의 윤리: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혈연에 기반한 친족의 해체, 사회적 고립, 자기돌봄의 실패와 같은 감염인의 고통을 응시하며 인간 삶의 일부를 기록하는 연구자의 손길이 과연 윤리적인지에 대한 물음(감염인의 삶을 어디까지 기술해야 하는가)은 논문을 쓰는 내내 떨쳐낼 수 없는 딜레마였다. 타인의 고난과 저항을 ‘연구’라는 틀 안에 가두는 순간, 글쓰기는 해방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통치 기술이 될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바바라 크룩생크(Barbara Cruikshank)의 통찰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크룩생크는 사회과학 지식이 단순히 중립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현상을 문제화하는 권력의 작동 방식임을 강조한다. 중언하면, 이러한 지식 생산의 메커니즘은 연구자가 속한 지식 철학의 관점은 물론, 궁극적으로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안에 포섭되어 있으며, 연구자는 외부의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통치 기술 내부에 깊숙이 연루된 행위자다. 이때, 연구자의 윤리적 책무는 자신의 지식 생산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통치 메커니즘을 창출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술(記述)의 윤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기술의 윤리가 단순히 연구자의 통치적 연루를 비판하고 경계하는 데서 그친다면, 우리는 결국 침묵하거나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연구의 도구적 성격과 대상화(objectification)의 위험을 겸허히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실천적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연구자의 궁극적인 책무다. 이것은 연구자가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고수하는 대신, ‘훈련된 주관성’을 동원함으로써 연구 대상자로 상정되는 이들이 “연구자로서 말할 ‘자격’의 감각을 확보”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글쓰기의 진정한 목적은 감염인의 삶이 ‘결함 있는 개인’의 특수성이 아니라, ‘배제와 낙인이라는 상황’의 특수성 속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 조건의 보편성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은 감염인의 전언에 기대어, 존엄성이 훼손된 인간이 겪는 고립과 절망을 그들과 결부된 어떤 종류의 병리나 나약함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그렇게 만든 환경이 낳은 결과로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논문에서 언급된) 삶의 전반에서 스스로를 배제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한국의 구시대적 감염인 통제 체계는 생물학적 지속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 자원을 획득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회의와 체념으로 답하게 하는 조건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에 더해 감염인을 특수한 인간 집단으로 규정하여 이들 존재를 일방적 수혜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접근은 이들이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소진해가며 스스로의 존재를 부단히 증명해야 하는 난국을 영속화 한다. 논문에 등장하는 감염인들은 ‘돌봄’이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긍정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회복을 경험한다. 선택할 수 없지만 바뀔 수 있는 운명이라는 감각,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운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통해 손상된 몸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해석하는 인간 존재의 긍지는 정상과 비정상의 교란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음을, 감염인들은 그들의 몸과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오류와 편향을 적극적으로 반복하고 향유하기
물론, 상술한 그간의 논의가 ‘해석이란 의미 부여를 거쳐 텍스트를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행위’라는 점에 더해, 연구자의 주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안다. 가령, 모든 것은 저마다의 해석에 달려 있으니 정답은 없다는 식으로 객관성의 무용론을 설파하거나 객관화된 평가를 방기하는 논리로 작용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질적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인터뷰 자료는 당사자의 경험과 관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 발화를 맥락에서 분리해 오독할 위험도 함께 지닌다. 이러한 맥락 결여는 발화자를 둘러싼 상황적 특수성을 소거하고, 그 발화를 개인의 근본적인 속성의 결과로 일반화하여 해석하게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근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로 명명한다. 아울러, “모든 인간 관계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편으로는 도구적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라는 사실은 인간 대상 연구가 본질적으로 침습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질적연구의 위험과 가치는 연구자가 열린 참여, 솔직함, 수용성의 정신으로 연구 대상을 만나면서 발생하는 문화 해석의 충돌 과정 그 자체에 있으므로, 그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감각하고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결국, ‘연구’라는 과업은 특정 목표를 상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타자의 존재, 즉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감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도구적이다. 대상화를 피하기 위한 연구자의 실천은 타인의 세계를 부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상징적, 해석적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수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동시에, 그것은 상존하는 왜곡의 가능성에도 타인의 고통을 지속해서 마주하고 기꺼이 곁을 내주는 다정함의 실천이기도 하다. 타자가 경험할 상처나 외로움의 가능성을 온 힘 다해 감각하려고 애쓰는 것, 이것은 인간 관계의 본질적인 속성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것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겠다는 세심함이다. 내가 연구 과정에서 느꼈던 모종의 불편함과 죄의식—‘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집요한 물음, 르포르타주와 학술문 사이에서의 방황—정확히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구 행위가 타인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프레임화 하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형태의 권력 관계를 생산하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연구의 타당성은, 그렇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내 논문은 관조적이고 절제된 글쓰기가 아니었다. 감정이 곳곳에 스며 있고. 비릿한 분노도 배어 있다. 그래서 논문 지도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있었다. 연구자에게 ‘모르는 것은 곧 말할 수 없는 것’일 때가 많고,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응당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간에 대한 탐구가 영영 좁힐 수 없는 몰이해 위해서 전개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망각하지 않되, 그 진리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객관과 주관의 경계에 안락한 점이지대를 설정함으로써 연구자의 위치성을 ‘적절히’ 절충하는 것보다는 ‘나’의 목소리가 담긴 발칙한 연구가, 그리하여 누군가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생동하는 연구’가 계속해서 등장했으면 좋겠다. 여러분도 내가 느낀 모종의 불편함과 죄의식을, 그 오류와 편향을 적극적으로 반복하고 향유하는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가치, 관행이라는 전통적인 ‘문화의 정의’가 문화와 공동체 내의 실제 다양성을 본질적으로 소외시키고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학계 안팎의 질서에 도전하는『도착』의 존재는 더욱 반갑다. 『도착』이기에 비로소, 더 과감하고 발칙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이 완벽한 물리적· 사회적 우연성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곧 인간 자체가 불평등한 조건을 내포한 채 살아가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출생과 동시에 부여되는 건상 상태나 사회적 자원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의 낯섦(queer)과 취약성에 주목하고 이를 돌보아야 할 윤리적 책무를 실천함으로써 존엄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가 고유한 ‘퀴어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자꾸만 섞이고, 말해져야만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광장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최정빈
보건정책관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한국의 HIV/AIDS 인식∙행태 조사표 개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준별하기보다 그 경계를 허물 때, 비로소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지닌 다정함과 사랑의 힘을 정말로, 굳게 믿으며 살아간다. moresleeeep@gmail.com
Scheper-Hughes, N.(2000), “Ire in Ireland”, Ethnography, 1(1), 117-140.↩
크룩생크, 바바라(2014),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심성보(역), 서울: 갈무리↩
여기서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은 미셸 푸코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권력으로 권력체계의 현시인 법과 제도 같은 특정 규범에 속한 인간이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내면화한 규율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구조적 힘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Scheper-Hughes(2000)의 훈련된 주관성은 연구자가 자신의 감정· 가치· 입장을 분석을 흐리는 위험요소가 아니라, 관찰을 더 깊게 만드는 기제로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Scheper-Hughes는 연구 대상자들은 말 그대로 우리의 대상(subjects)이 아니라, 우리의 동반자(boon companions)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보경(2017), “역량강화(empowerment)라는 사회과학의 비전: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를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332-366.↩
Maxwell, Joseph A., Chmiel, M.(2014), “Generalization in and form qualitative analysis”, In U. Flick(Ed.), The SAGE handbook of qualitative data analysis, Thousand Oaks: SAGE Publications Inc., pp. 540-553.↩
이용숙, 이수정, 정진웅, 한경구, 황익주(2012), 『인류학 민족지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일조각↩
Maxwell, Joseph A., Chmiel, M., op. cit., p.543.↩
3호(2025.12.) l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 l 신진연구
윤리의 기술(伎術), 기술(記述)의 윤리
「HIV/AIDS 감염인 커뮤니티의 자조 돌봄 사례연구」 (2025)
최정빈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학술문’과 ‘르포르타주(reportage)’는 준별되어야 하는가?
웹진 『도착』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은 뒤, 학위 과정 내내 끈질기게 붙들었던 ‘연구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물음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나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의 HIV/AIDS 감염인 커뮤니티가 낙인과 공적 돌봄 체계의 공백 속에서 스스로 구축한 자조 돌봄 사례를 질적으로 탐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가 전공한 보건학은 실용적 학문이자, 다학제적 학문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적극적으로 표방한다. 연구 과정에서 나는, 이 학문이 표방하는 정체성이 ‘연구의 결과는 마땅히 실용적이어야만 한다’는 차갑고 거친 정언명령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여러 영역으로 구획된 접근법과는 무관하게, 연구라는 과업은 특정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의 역사에 놓인 사건을 포착하고, 그것에 얽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감각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도출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성된 누군가의 이야기가 공통의 공간과 환경을 공유하는 특정 집단의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타자에게까지 가닿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글쓰기를 통해 한데 모아내는 작업이 필연적이다. 요컨대, 연구란 글쓰기를 통해 세계에 말을 건네는 행위이자 연구자가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미묘한 길항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스스로의 언어를 구축해 나가는 기술(記述)행위의 총체이기도 하다.
하나, 문제는 보건학의 문법이 내가 마주한 삶의 현장과 곧바로 접속하지 않는 데 있었다. 내가 목도한 감염인들의 삶은 통계와 일반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보건학의 주류적 언어로 쉽게 포섭될 수 없는 지극히 내밀한 개인의 서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내게 있어 이것을 기술하는 과정은 ‘르포르타주’와 고정된 형식 안에서 엄밀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보건학적 학술문’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었다. 연구 과정에서 특정한 글쓰기의 형식—여기서 글쓰기의 형식은 방법론적 엄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술문의 서식을 의미한다—이 부분적으로 차용될 수는 있으나, 고정된 형식이 강요될 이유는 없다. 다학제적 학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보건학이 스스로 독자적인 외연을 구축하기 위한 접근이 기술 방식, 즉 서식의 정형화라면 이는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아울러, 현상에 대한 기술은 ‘번역 행위’이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실은 연구자와 연구 대상자라는 두 세계와 두 문화 간의 충돌에서 비롯하기에 그 자체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질적연구자가 기술 과정에서 객관성을 잃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애초에 요점을 벗어난 것이어서, 당시에 나는 때때로 보건학이 어떤 멍에처럼 느껴져 억하심정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얼마간 사회학이나 인류학에 눈길을 돌려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고도로 훈련된 주관성1이라는 주장들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반추해 보면 나는 보건학의 정석에서 조금 빗겨 있는 이단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어떤 종류의 어긋남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연구적 실천은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계속해서 묻고 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내가 배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의 기술(伎術)이라고 생각했다.
윤리의 기술(伎術), 기술(記述)의 윤리: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혈연에 기반한 친족의 해체, 사회적 고립, 자기돌봄의 실패와 같은 감염인의 고통을 응시하며 인간 삶의 일부를 기록하는 연구자의 손길이 과연 윤리적인지에 대한 물음(감염인의 삶을 어디까지 기술해야 하는가)은 논문을 쓰는 내내 떨쳐낼 수 없는 딜레마였다. 타인의 고난과 저항을 ‘연구’라는 틀 안에 가두는 순간, 글쓰기는 해방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통치 기술이 될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바바라 크룩생크(Barbara Cruikshank)의 통찰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크룩생크는 사회과학 지식이 단순히 중립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현상을 문제화하는 권력의 작동 방식임을 강조한다.2 중언하면, 이러한 지식 생산의 메커니즘은 연구자가 속한 지식 철학의 관점은 물론, 궁극적으로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3안에 포섭되어 있으며, 연구자는 외부의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통치 기술 내부에 깊숙이 연루된 행위자다. 이때, 연구자의 윤리적 책무는 자신의 지식 생산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통치 메커니즘을 창출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술(記述)의 윤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기술의 윤리가 단순히 연구자의 통치적 연루를 비판하고 경계하는 데서 그친다면, 우리는 결국 침묵하거나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연구의 도구적 성격과 대상화(objectification)의 위험을 겸허히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실천적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연구자의 궁극적인 책무다. 이것은 연구자가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고수하는 대신, ‘훈련된 주관성’4을 동원함으로써 연구 대상자로 상정되는 이들이 “연구자로서 말할 ‘자격’의 감각을 확보”5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글쓰기의 진정한 목적은 감염인의 삶이 ‘결함 있는 개인’의 특수성이 아니라, ‘배제와 낙인이라는 상황’의 특수성 속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 조건의 보편성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은 감염인의 전언에 기대어, 존엄성이 훼손된 인간이 겪는 고립과 절망을 그들과 결부된 어떤 종류의 병리나 나약함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그렇게 만든 환경이 낳은 결과로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논문에서 언급된) 삶의 전반에서 스스로를 배제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한국의 구시대적 감염인 통제 체계는 생물학적 지속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 자원을 획득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회의와 체념으로 답하게 하는 조건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에 더해 감염인을 특수한 인간 집단으로 규정하여 이들 존재를 일방적 수혜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접근은 이들이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소진해가며 스스로의 존재를 부단히 증명해야 하는 난국을 영속화 한다. 논문에 등장하는 감염인들은 ‘돌봄’이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긍정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회복을 경험한다. 선택할 수 없지만 바뀔 수 있는 운명이라는 감각,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운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통해 손상된 몸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해석하는 인간 존재의 긍지는 정상과 비정상의 교란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음을, 감염인들은 그들의 몸과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오류와 편향을 적극적으로 반복하고 향유하기
물론, 상술한 그간의 논의가 ‘해석이란 의미 부여를 거쳐 텍스트를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행위’라는 점에 더해, 연구자의 주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안다. 가령, 모든 것은 저마다의 해석에 달려 있으니 정답은 없다는 식으로 객관성의 무용론을 설파하거나 객관화된 평가를 방기하는 논리로 작용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질적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인터뷰 자료는 당사자의 경험과 관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 발화를 맥락에서 분리해 오독할 위험도 함께 지닌다.6 이러한 맥락 결여는 발화자를 둘러싼 상황적 특수성을 소거하고, 그 발화를 개인의 근본적인 속성의 결과로 일반화하여 해석하게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근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로 명명한다. 아울러, “모든 인간 관계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편으로는 도구적 성격을 지니게 마련”7이라는 사실은 인간 대상 연구가 본질적으로 침습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질적연구의 위험과 가치는 연구자가 열린 참여, 솔직함, 수용성의 정신으로 연구 대상을 만나면서 발생하는 문화 해석의 충돌 과정 그 자체에 있으므로, 그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감각하고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결국, ‘연구’라는 과업은 특정 목표를 상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타자의 존재, 즉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감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도구적이다. 대상화를 피하기 위한 연구자의 실천은 타인의 세계를 부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상징적, 해석적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수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동시에, 그것은 상존하는 왜곡의 가능성에도 타인의 고통을 지속해서 마주하고 기꺼이 곁을 내주는 다정함의 실천이기도 하다. 타자가 경험할 상처나 외로움의 가능성을 온 힘 다해 감각하려고 애쓰는 것, 이것은 인간 관계의 본질적인 속성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것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겠다는 세심함이다. 내가 연구 과정에서 느꼈던 모종의 불편함과 죄의식—‘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집요한 물음, 르포르타주와 학술문 사이에서의 방황—정확히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구 행위가 타인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프레임화 하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형태의 권력 관계를 생산하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연구의 타당성은, 그렇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내 논문은 관조적이고 절제된 글쓰기가 아니었다. 감정이 곳곳에 스며 있고. 비릿한 분노도 배어 있다. 그래서 논문 지도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있었다. 연구자에게 ‘모르는 것은 곧 말할 수 없는 것’일 때가 많고,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응당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간에 대한 탐구가 영영 좁힐 수 없는 몰이해 위해서 전개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망각하지 않되, 그 진리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객관과 주관의 경계에 안락한 점이지대를 설정함으로써 연구자의 위치성을 ‘적절히’ 절충하는 것보다는 ‘나’의 목소리가 담긴 발칙한 연구가, 그리하여 누군가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생동하는 연구’가 계속해서 등장했으면 좋겠다. 여러분도 내가 느낀 모종의 불편함과 죄의식을, 그 오류와 편향을 적극적으로 반복하고 향유하는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가치, 관행이라는 전통적인 ‘문화의 정의’가 문화와 공동체 내의 실제 다양성을 본질적으로 소외시키고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8에서, 학계 안팎의 질서에 도전하는『도착』의 존재는 더욱 반갑다. 『도착』이기에 비로소, 더 과감하고 발칙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이 완벽한 물리적· 사회적 우연성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곧 인간 자체가 불평등한 조건을 내포한 채 살아가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출생과 동시에 부여되는 건상 상태나 사회적 자원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의 낯섦(queer)과 취약성에 주목하고 이를 돌보아야 할 윤리적 책무를 실천함으로써 존엄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가 고유한 ‘퀴어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자꾸만 섞이고, 말해져야만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광장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최정빈
보건정책관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한국의 HIV/AIDS 인식∙행태 조사표 개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준별하기보다 그 경계를 허물 때, 비로소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지닌 다정함과 사랑의 힘을 정말로, 굳게 믿으며 살아간다. moresleeeep@gmail.com
Scheper-Hughes, N.(2000), “Ire in Ireland”, Ethnography, 1(1), 117-140.↩
크룩생크, 바바라(2014),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심성보(역), 서울: 갈무리↩
여기서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은 미셸 푸코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권력으로 권력체계의 현시인 법과 제도 같은 특정 규범에 속한 인간이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내면화한 규율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구조적 힘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Scheper-Hughes(2000)의 훈련된 주관성은 연구자가 자신의 감정· 가치· 입장을 분석을 흐리는 위험요소가 아니라, 관찰을 더 깊게 만드는 기제로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Scheper-Hughes는 연구 대상자들은 말 그대로 우리의 대상(subjects)이 아니라, 우리의 동반자(boon companions)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보경(2017), “역량강화(empowerment)라는 사회과학의 비전: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를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332-366.↩
Maxwell, Joseph A., Chmiel, M.(2014), “Generalization in and form qualitative analysis”, In U. Flick(Ed.), The SAGE handbook of qualitative data analysis, Thousand Oaks: SAGE Publications Inc., pp. 540-553.↩
이용숙, 이수정, 정진웅, 한경구, 황익주(2012), 『인류학 민족지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일조각↩
Maxwell, Joseph A., Chmiel, M., op. cit., p.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