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2025.12.) l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 l 신진연구
나의 연구, 나의 해방
「1990년대 소설과 영화의 퀴어 섹슈얼리티 연구: 퀴어 주체의 정체성 트러블을 중심으로」 (2025)
정윤영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저는 지금 11월의 초입에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께서는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을 맞으셨겠지요. 존경하고 친애하는 학회원 여러분께선 어떤 한 해를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언제 올지 모를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 소개를 드리는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저는 먼저 좋아하고 더 좋아하는 쪽인 듯한데요, 그래도 기쁩니다. 이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지금껏 아무것도 써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지난 2월에는 「1990년대 소설과 영화의 퀴어 섹슈얼리티 연구: 퀴어 주체의 정체성 트러블을 중심으로」라는 거창한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이 논문에 담긴 문제의식은 간단합니다. 저는 퀴어와 퀴어 섹슈얼리티의 ‘적절한’ 재현에 대한 편집증을 내려놓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어떤 텍스트에서 재현된 퀴어 섹슈얼리티는 얼마나 정치적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성애적이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긍정적이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이 물음들이 결국 ‘퀴어 서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인증 마크(?)가 진정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차근차근 짚어보기 위한 징검다리들이었음을, 학위청구논문을 최종적으로 수정하는 단계가 되어서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고요.
그런데, 논문을 어떻게든 제출한 후에야 어렵게 깨달은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올해 7월, 우리 학회의 여름 학술대회에서도 세션 발표를 통해 한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자기 이론적 작업으로서 퀴어 서사 연구: ‘퀴어-연구자’의 세 가지 곤경」), 약 이년에 걸쳐 학위논문을 정리하는 동안에 저는 어떤 텍스트보다도 저 자신을 새롭게 읽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소속 대학원 안의 유일한 오픈리 퀴어로 살면서, 강의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저는 교수님들이나 동료 학생들을 향해 저 자신을 언제나 ‘적절히’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이름과 얼굴을 아는 하나뿐인 퀴어가 하필이면 나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어떤 분들께서는 너끈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학위논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존재론적 탈피를 경험했다고 한다면, 그건 연구자로서 의미 있는 질적 도약을 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저라는 사람 자체의 비가역적인 갱신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가령, 1990년대의 소설과 영화에 나타난 퀴어 주체들의 정체성 트러블을 해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저 자신에게 부여한 재현의 강박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전까지의 저는, 내심 내가 얼마나 ‘투사’다워야 하는지, 내 성애적 욕망이 충분히 ‘퀴어’한지, 내가 과연 ‘미래 있는 삶’을 사는 듯 보이고 있는지, 그런 모순적인 강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삶을 가장 근본적인 비평적 자원으로 활용한 이 작업을 통해서, 적어도 제 안에 그런 욕망이 있었음을 겸허히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을 덜어낼 용기를 얻었습니다. ‘듀선생의 인생 제반 연구소’ 238화에 나오는 한 대사처럼, 연구란 것이 정말 그 연구로써 자기 해방을 목적하는 무엇이라면, 그렇게 자기와의 관계를 새로 꾸림으로써 근본적으로 자기 돌봄을 실천하는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의 관계에서 조금 편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로는 무엇을 하고 있냐면요. 올해 하반기부터는 좋은 출판사와 연을 맺고, 자기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한 연구자가 퀴어 이론이나 퀴어 서사와 관계 짓는 방식을 고민하는 책을 짓고 있습니다. 재현의 문제는 반드시 그 재현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수치심과 자긍심이라는 기묘한 쌍둥이 감정과도 연결돼 있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가는 중입니다. 또 여성 아닌 여성, 퀴어 아닌 퀴어, 청년 아닌 청년, 그러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의 교집합이자 여집합인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과 아님, 있음과 없음, 잠재와 비잠재의 상태가 진실로 공존하는 이 문제적 상황, 자기의 자기임(self-ness)을 고민하는 누구든 경험하기 마련인 보편적 걱정거리로서의 정체성 트러블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자기 이론, 자기 서사, 당사자성, 자기 돌봄, 커밍아웃과 아웃팅, 퀴어 공동체, 타자 지향적 나르시시즘 등등, 고민해야 할 말들이 이렇듯 한가득 남아있고, 요즘은 이 말들 사이에 기꺼이 묻혀 지냅니다.
노파심에 덧붙이면, 저는 이 고민들이 저만의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님을 알아서 오히려 선뜻 놓기가 어렵습니다. 문예창작학과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또 소설과 비평을 써오는 동안에, 저는 바로 이런 문제들을 끌어안고 삶의 지속/중단 여부를 고민하는 친구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철없고 덜 자란 저를 계속 견뎌준 그들과의 시간을 기억하는 동안만큼은, 저는 그들에 대한 책임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퀴어 서사 연구란, 영영 구체화될 수 없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로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서사들 안에 숨겨진 우리 삶의 변화 가능성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정치 행위로 느껴집니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제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당분간은 이 공부에 온전히 매료된 상태로 살아 볼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께 반가운 답장을 받을 날도 오겠지요. 그때는 이미 오랫동안 알아 온 막역한 친구처럼 다정하게 인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겨울이 많이 춥다고 합니다. 부디 건강 조심하세요.
정윤영
문예창작학과와 국어국문학과에서 비평을 전공했다. 소설, 영화, 웹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서사 텍스트를 읽고, 그것들에 대한 여러 형식의 글쓰기를 실험한다.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이 고통스러울 만큼 재밌다. strack28@seoultech.ac.kr
3호(2025.12.) l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 l 신진연구
나의 연구, 나의 해방
「1990년대 소설과 영화의 퀴어 섹슈얼리티 연구: 퀴어 주체의 정체성 트러블을 중심으로」 (2025)
정윤영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저는 지금 11월의 초입에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께서는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을 맞으셨겠지요. 존경하고 친애하는 학회원 여러분께선 어떤 한 해를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언제 올지 모를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 소개를 드리는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저는 먼저 좋아하고 더 좋아하는 쪽인 듯한데요, 그래도 기쁩니다. 이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지금껏 아무것도 써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지난 2월에는 「1990년대 소설과 영화의 퀴어 섹슈얼리티 연구: 퀴어 주체의 정체성 트러블을 중심으로」라는 거창한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이 논문에 담긴 문제의식은 간단합니다. 저는 퀴어와 퀴어 섹슈얼리티의 ‘적절한’ 재현에 대한 편집증을 내려놓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어떤 텍스트에서 재현된 퀴어 섹슈얼리티는 얼마나 정치적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성애적이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긍정적이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이 물음들이 결국 ‘퀴어 서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인증 마크(?)가 진정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차근차근 짚어보기 위한 징검다리들이었음을, 학위청구논문을 최종적으로 수정하는 단계가 되어서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고요.
그런데, 논문을 어떻게든 제출한 후에야 어렵게 깨달은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올해 7월, 우리 학회의 여름 학술대회에서도 세션 발표를 통해 한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자기 이론적 작업으로서 퀴어 서사 연구: ‘퀴어-연구자’의 세 가지 곤경」), 약 이년에 걸쳐 학위논문을 정리하는 동안에 저는 어떤 텍스트보다도 저 자신을 새롭게 읽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소속 대학원 안의 유일한 오픈리 퀴어로 살면서, 강의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저는 교수님들이나 동료 학생들을 향해 저 자신을 언제나 ‘적절히’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이름과 얼굴을 아는 하나뿐인 퀴어가 하필이면 나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어떤 분들께서는 너끈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학위논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존재론적 탈피를 경험했다고 한다면, 그건 연구자로서 의미 있는 질적 도약을 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저라는 사람 자체의 비가역적인 갱신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가령, 1990년대의 소설과 영화에 나타난 퀴어 주체들의 정체성 트러블을 해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저 자신에게 부여한 재현의 강박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전까지의 저는, 내심 내가 얼마나 ‘투사’다워야 하는지, 내 성애적 욕망이 충분히 ‘퀴어’한지, 내가 과연 ‘미래 있는 삶’을 사는 듯 보이고 있는지, 그런 모순적인 강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삶을 가장 근본적인 비평적 자원으로 활용한 이 작업을 통해서, 적어도 제 안에 그런 욕망이 있었음을 겸허히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을 덜어낼 용기를 얻었습니다. ‘듀선생의 인생 제반 연구소’ 238화에 나오는 한 대사처럼, 연구란 것이 정말 그 연구로써 자기 해방을 목적하는 무엇이라면, 그렇게 자기와의 관계를 새로 꾸림으로써 근본적으로 자기 돌봄을 실천하는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의 관계에서 조금 편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로는 무엇을 하고 있냐면요. 올해 하반기부터는 좋은 출판사와 연을 맺고, 자기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한 연구자가 퀴어 이론이나 퀴어 서사와 관계 짓는 방식을 고민하는 책을 짓고 있습니다. 재현의 문제는 반드시 그 재현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수치심과 자긍심이라는 기묘한 쌍둥이 감정과도 연결돼 있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가는 중입니다. 또 여성 아닌 여성, 퀴어 아닌 퀴어, 청년 아닌 청년, 그러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의 교집합이자 여집합인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과 아님, 있음과 없음, 잠재와 비잠재의 상태가 진실로 공존하는 이 문제적 상황, 자기의 자기임(self-ness)을 고민하는 누구든 경험하기 마련인 보편적 걱정거리로서의 정체성 트러블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자기 이론, 자기 서사, 당사자성, 자기 돌봄, 커밍아웃과 아웃팅, 퀴어 공동체, 타자 지향적 나르시시즘 등등, 고민해야 할 말들이 이렇듯 한가득 남아있고, 요즘은 이 말들 사이에 기꺼이 묻혀 지냅니다.
노파심에 덧붙이면, 저는 이 고민들이 저만의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님을 알아서 오히려 선뜻 놓기가 어렵습니다. 문예창작학과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또 소설과 비평을 써오는 동안에, 저는 바로 이런 문제들을 끌어안고 삶의 지속/중단 여부를 고민하는 친구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철없고 덜 자란 저를 계속 견뎌준 그들과의 시간을 기억하는 동안만큼은, 저는 그들에 대한 책임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퀴어 서사 연구란, 영영 구체화될 수 없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로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서사들 안에 숨겨진 우리 삶의 변화 가능성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정치 행위로 느껴집니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제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당분간은 이 공부에 온전히 매료된 상태로 살아 볼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께 반가운 답장을 받을 날도 오겠지요. 그때는 이미 오랫동안 알아 온 막역한 친구처럼 다정하게 인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겨울이 많이 춥다고 합니다. 부디 건강 조심하세요.
정윤영
문예창작학과와 국어국문학과에서 비평을 전공했다. 소설, 영화, 웹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서사 텍스트를 읽고, 그것들에 대한 여러 형식의 글쓰기를 실험한다.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이 고통스러울 만큼 재밌다. strack28@seoul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