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2025.12.) l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 l 신진연구
페미니즘의 부정성과 마주하기
홍보람
몇 주 전 트위터에서, 돌이켜보니 ‘미러링’이고 ‘리부트’고 그저 다 남초 커뮤니티의 여성적 데칼코마니에 불과했던 것 같다는 회한 어린 트윗을 마주하고 북마크를 누른 뒤 생각에 잠겼다. 미러링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애초에 의도했던 소격효과라는 기원은 사라지고 반사적 제스처만 몸에 붙어 윤리적 제어 없이 루키즘을 발사하는 게 유사 페미니즘으로 여겨진 지도 이미 오래되었을까? 어느 논바이너리 트랜스의 성별 정정 소식 트윗에 300개 이상의 비난 인용이 붙는 여전한 트랜스 혐오와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관계는 충분히 조명이 되었던가? 극우 정치인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선출을 여성의 이름으로 공식 환영하는 여성의당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어두운 일면 정도로 여기고 지나가면 되는 걸까…….
이런 현재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그것의 무망함을 속단하는 것만큼이나 불완전하고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페미니즘의 폭력성과 반동성을 외면하지 않는 동시에 페미니즘의 주체성과 행위성을 무효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들이 필요할까? 전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고의로 누락시키고, 후자만을 강조하는 것은 페미니즘 속에서 취약해지는 삶들이 페미니즘의 관심사가 아니며, 중요하게 고려할 만한 대상도 아니라는 선언이다. 페미니즘은 이런 선언의 반복이었고, 이에 항의하는 비백인, 제3세계, 트랜스젠더퀴어, 노동 계급, 장애 페미니스트 주체들의 비판을 통해서 페미니즘은 변혁적 운동이자 이론이자 이념으로서 스스로를 유지해 왔다.
최근 우리 시대의 반동주의와 페미니즘이 어떻게 접합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연구들은 진보적 페미니즘 대 보수적 반페미니즘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로는 현재의 문화적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젠더 비판적 페미니즘’이나 TERF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전제하는 것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구조 자체에 내재한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짚거나, TERF로 당장 활동하지 않으며 다양한 젠더에 우호적인 ‘시스 페미니즘’이 어떻게 트랜스포비아로 전환될 가능성을 배양하고 있는지 분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들이 “페미니즘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정치적 선(善)으로 찬양하는 서사”를 지양하는 데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는 까닭은 페미니즘이 반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반 파시스트 조직화를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게끔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글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대중화된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우경화의 단초들을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 것’으로 솎아 내거나 특정 소수 집단의 경향으로 구획하기보다, 오히려 이 단초들을 통해서 페미니즘 자체를 재고하고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가늠해 보려 한다.
대중적 페미니즘과 가시성의 경제: 페미니즘 티셔츠가 정치가 될 때
2015년 무렵부터 그 이후 몇 년간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여느 때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인기 있었던’ 시대였다. 각종 온라인 해시태그 운동, 페미사이드와 디지털 성 착취에 반대하여 수만 명이 결집한 집회들, 2016년 소라넷 폐지를 이끈 활동들, 여성 서사는 ‘밀어주고’ 여성혐오 콘텐츠는 ‘안 사요’로 대응하는 구매력 행사의 방식들, 페미니즘 독서 모임의 번성, 페미니즘 서적과 여성 작가들의 주류화, 자신의 일상과 욕망을 ‘6B4T’라는 원칙 아래 재구축하는 실천들… 아마도 페미니즘 인기에 소구하여 따낸 가장 큰 판돈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SNS에 ‘짤’의 형태로 게시하고 남성층의 지지를 얻으며 2022년 당선된 전 파면 대통령 사례일 것이다. 이 시기 페미니즘은 ‘쓰까’와 ‘랟펨’이라는 첨예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popular) 페미니즘’의 동학 속에서 뒤엉켜 진동하고 있었다.
한국과 비슷한 시기 북미와 유럽에서 페미니즘이 소수 아카데믹 집단이나 특정 모임을 넘어 각종 디지털 공간과 대중 미디어, 상업 미디어의 순환되는 담론과 실천에서 나타나 인기를 얻는 양상을 분석한 사라 바넷-와이저는 이 대중적 페미니즘을 자신감 회복(empowered)과 상처(injury), 그리고 ‘가시성의 경제’를 토대로 작동하는 특수한 실천으로 정의한다. 기존 가시성의 정치가 특정한 집단을 조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밝히려는 수단으로 가시성을 활용했던 반면, 가시성의 경제는 가시성을 목적 그 자체로 전환한다. 이 경제 속에서 페미니즘이 ‘보이게 되는’ 것과 페미니즘에 돈을 쓰는 것은 곧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페미니즘 티셔츠가 바로 정치다 […]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정체화하는 것은 충분한 정치적 행동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 역학으로 대중화된 여성혐오가 거울 효과처럼 작동하면서 클릭 수, 리트윗, ‘좋아요’ 등의 축적이 필요한 기술‧경제적 맥락의 미디어 풍경을 함께 만들고,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양자에 정치적 행동을 위한 공간과 자원을 제공하며 인기를 얻는다.
대중적인 가시성의 확장은 분명 페미니즘을 듣고 생각하고 말할 공간과 기회를 열지만, 또한 누가 가시성을 획득하느냐를 둘러싼 경쟁 속으로 정치를 용해한다. 어떤 해시태그를 더 많이 노출하고 누구의 이미지를 가시화하며 소비할 것인가라는 경쟁 속에서 임금, 재생산 노동, 복지 제도 개혁 같은 물질적 의제는 주변화되고 주목 경제의 가시성에 참여하는 이미지들은 트렌드에 맞춰 규범화된다. 나아가 가시성의 경제는 감시의 메커니즘에도 의존한다. 주변화된 차이의 주체들에게 주목이 가해지는 순간 이들은 훈육되고 처벌받는다. 대중적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급진적 의미를 자기 계발과 자존감의 언어로 희석하는 경향을 보이며, 결국 집단 정치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관리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재구성한다. 그럼에도 대중적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중적 페미니즘이 필요하지 않을까? 둘은 가시성의 경제 안에서 팽팽하게 맞붙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과 소비에 초점을 맞추는 대중적 페미니즘과 달리, 대중적 여성혐오는 국가‧법‧정책‧폭력 기구와 훨씬 더 촘촘히 결합해 자신의 가부장적 구조를 성공적으로 강화한다는 점에서 실상 비대칭적 관계를 이룬다. 남성성에 페미니스트들이 가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가부장제를 다시 불러 올 필요를 호소하는 극우파들의 전 지구적 가시성은 남성 일반에게 타격을 가하는 방식의 정치적 유효함을 재고하게 한다. 결국 지역‧돌봄 네트워크나 오프라인 연대와 같은 잘 보이지 않는 기층 조직화 작업이 구조 변화를 준비하는 핵심임에도, 끊임없이 브랜드화하는 주체만이 정치적 행위자로 인정되는 가시성의 경제에서는 비가시적 정치의 중요성이 퇴색한다.
가시성의 경제라는 개념은 보편적‧추상적인 인권이 한국의 대중적 페미니즘에서 왜 한정된 파이를 나누는 문제이자 피해자성의 경합으로 이해되었는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아프며, 트랜스젠더퀴어이거나, 남성에게 여전한 애착을 갖는 실제적인 여성들의 삶은 ‘정상에서 만날’ 여성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퇴보시키는 위험한 이미지로 여겨지며 훈육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남성들이 자신들의 불안과 박탈감을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돌리며 가부장적 구조를 미디어 시장, 대학 사회, 정치계까지 촘촘하게 강화하는 동안, 지난 10년 재부상한 페미니즘이 ‘여성 연대’를 외치면서도 현장과 활동들에 충분히 연결되지 못한 채 개별화된 실천 속에서 흩어진 상황은 가시성의 경제를 곧 정치로 치환했을 때의 한계를 재고하게 한다.
반동적 페미니즘의 “반희망적 감정 구조”와 미시 파시즘적 욕망
생물학적 본질주의 수사의 강화와 TERF의 부상, 난민 입국 반대, 우파 여성 정치인 옹호나 극우 정치와의 공조 등 대중적 페미니즘의 반동적 전환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교양지 애틀랜틱은 2023년 반동적 페미니즘(reactionary feminism)을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라는 표면상 “급진적” 전제에 기반하면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진보적 정치를 배격하는 “신흥 페미니즘 흐름”으로 명시한다. 반동적 페미니즘은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낙태권을 주장하는 등 좌파의 외관을 갖지만 질리 케이는 이들이 실상 대안 우파나 남초 커뮤니티의 반동적 기업가 집단과 더욱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질리 케이는 대중적 페미니즘 내 반동적 전환들이 공유하는 근본적인 특징을 다음처럼 밝힌다. 첫째, 생물학적 본질주의. 둘째, “반희망적 감정 구조”라는 공격적 운명론. 셋째, 페미니즘, 계급, 공동체에 대한 수사적인 호소.
두 번째 특징인 반희망적 감정 구조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에서 기인한다. 이 본질주의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폭력을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고정된 성별을 여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체념하는 운명론이기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운명론이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성애 비관적 감정 구조는 세레신이 리 에델만을 인용하여 말하는 “마취적 감정”, 즉 “감정의 과도한 강렬함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감정”의 양성을 수반한다. 이는 “이성애 문화에 만연한 끔찍함과 마주하여 마음을 선제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성애 자체의 구조적 변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이 반희망적 감정 구조는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과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한 페미사이드가 만연한 나라이자, 불법 촬영‧웹하드 카르텔‧딥페이크 등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비즈니스 모델이 되고 디지털 산업 생태계를 이루는 “고어 자본주의” 국가 한국에서 더욱 깊고 짙은 비관적 정동으로 나타난다. 질리 케이가 분석하는 이성애 비관주의와 마취적 감정이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관계 조절 전략이었다면, 한국의 대중적 페미니즘에서 이러한 정동은 이성애를 비롯한 성애 자체를 거부하고 탈각시키는 원천이다. “섹스에 대한 증오”라고도 할 법한 이 현상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화하는 북미와 영국의 반동적 페미니즘과 달리 ‘디폴트 여성’이라는 추상화된 인간 모델을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접합시킨다.
또한, 질리 케이는 이성애 비관적 감정 구조가 양성하는 마취적 감정을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상화되는 자기 마비, 금욕주의, 남성적 자제심의 성별이 뒤바뀐 거울상 표현으로 이해하자고 주장한다. 질리 케이는 ‘마비된 주체’가 ‘감각적 연결’에 대항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려고 하는 욕망 속에서 미시 파시즘적 주체성의 생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잭 브라티치의 논의를 인용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마취적 감정을 동원하는 여성주의 커뮤니티에서도 미시 파시즘적 욕망이 조장되고 있다는 질리 케이의 주장은 ‘페미니스트 실천’을 위해 무수한 금지와 배제의 규범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뿐만 아니라 불링의 형태로 타자들을 처벌하며 전개되어 온 대중적 페미니즘의 일부 경향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마취적 감정의 역전된 성별성은 김보형이 분석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성상인 “페미니스트 이코노미쿠스”의 특징과도 맞물린다. 한국에서 대중적 페미니즘과 대중적 금융의 융합을 통해 형성된 페미니스트 이코노미쿠스는 여성이 자제력 없는 남성에 비해 더 이성적이고 신중하며 투자에 적합하다는 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의 언어’로 남성적 합리성과 여성적 비합리성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이 과정에서 금융과 주식은 여성들에게 불안정한 도박이 아닌 보람 있는 결과를 위해 채택할 수 있는 실천으로 펼쳐지며 정당성을 강화한다.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급진’의 언어를 차용하지만 ‘여성 버핏(Woman Buffett)’으로서 금융 자본주의를 지지하며 연결과 연대를 거부하는 반동적 페미니즘의 실천들은 이성애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역시 필연적인 체계라는, 변화에 대한 반희망적 감정 구조 속에 있다. 대중적 페미니즘 내 반동적 전환은 “대안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특정한 여성화된 표현”이며, 또한, 불평등 심화, 미시 파시즘의 확산,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상상력의 광범위한 억압 등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현실적 문제들의 반응이자 증상이다.
다른 세계를 짓는 방법
어떻게 우리는 반동적 페미니즘의 기저에 있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반희망적 감정 구조, 미시 파시즘에 균열을 내며 집합적 불만과 다른 형태의 삶을 향한 욕망의 키를 평등과 해방의 방향으로 틀 수 있을까? 이것은 페미니스트 이코노미쿠스 주체성을 열심히 실천하고 ‘여성’ 범주의 확고함을 의심치 않으며 트랜스젠더를 배격하는 일부 반동적 페미니스트들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다. 돈을 벌고 싶은 반자본주의자들, 능력주의와 성공 담론을 저주하면서 능력을 계발 중인 성실한 사람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길 선택하지만 우연한 친절로 얻은 기쁨을 종일 곱씹는 외로운 사람들, 분열하고 찢어지는 자아들,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이 끔찍한 세계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주의의 선명함은 다른 세계를 짓는 사람들과 감각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흔들리고 옅어지는 것 같다. 윤석열 퇴진 투쟁이 한창이던 올해 3월,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열린 대회에 참여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서울역 광장 계단에 앉아 故강태완 님 어머니의 발언을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각국의 음료를 나누는 트럭이 운영되었고 간단한 구호를 외친 후 차를 받을 수 있었다. 따뜻한 팔레스타인 잎차를 받아 자리로 돌아오면서, 이곳의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고 각자 다르지만, 절박한 의제를 향해 모였다는 찰나의 공통감각 속에서 숨을 쉴 수 있구나, 생각했다. 이 연약한 공통감각은 언뜻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의 입구다. 지혜복 교사, 고진수 지부장, 이스라엘이야말로 우리를 죽이고 있다고 외치는 가자지구의 퀴어들, 기아차 화성 공장 청소 노동자들, 이 투쟁하는 사람들이 가시성의 정치를 통해 열어 준 입구들에 한 발을 내디뎌야 반희망적 감정 구조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짓는 감각에 동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연구는 피해자성의 경쟁이 아닌 취약성의 연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결국 취약성을 생산하는 구조를 밝히고 연대의 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를 개념화한 사야크 발렌시아는 고문‧시신 세력화로 남성성을 강화하는 남성 주체들을 분석하지만 이를 고정된 ‘여성’ 피해자 정체성과 연결하지 않고 트랜스 페미니즘 관점으로 확장한다. 성별에 따른 단순한 가해와 피해 이분법으로는 자본주의 폭력의 젠더화된 순환을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종화되고 식민화된 성별 비순응 인구의 취약성이 또한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많은 연구자들은 지적해 왔다. 이런 취약성의 연합이 다소 막연하고 당위적인 결론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 같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관한 다음의 질문을 더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이 필요하다. “정확히 어떻게 (사회적 의미에서) 취약성의 생산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가치의 생산과 연관될까?” 사회적 관계로서의 경제 속에서 취약성을 경험하는 여성-트랜스-퀴어들과 함께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지금 필요한 대항 담론을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홍보람
연구노동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퀴어팔레스타인연대QK48에서 활동한다. 맑시즘/유물론과 퀴어-페미니즘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연구한다. 활동하는 동료들이 덜 소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집회 짐을 창고에서 함께 나르고 있다.
Bassi, Serena, and Greta LaFleur(2022). “Introduction: TERFs, Gender-critical Movements, and Postfascist Feminisms”, Transgender Studies Quarterly, 9(3), 311-333.↩
Amery, Fran(2025), “Three Elements of Cisfeminism: Arrogant Perception, Will to Power and Attachment”, Sexualities, 0(0), 1–15.↩
Bassi and Lafleur, op. cit., p. 313.↩
Lewis, Sophie, and Asa Seresin(2022), “Fascist Feminism: A Dialogue”, Transgender Studies Quarterly, 9(3), 463-479.↩
이리예(2025), “짤의 시대, 안티페미니즘으로 공모하는 루저 남성 정서와 정치 언어”, 『폭주하는 남성성』, 도서출판 동녘.↩
Banet-Weiser, Sarah(2018), Empowered: Popular Feminism and Popular Misogyny, Duke University Press.↩
Ibid., p.23.↩
Lewis, Helen(2023), “The Feminists Insisting That Women are Built Differently”, Atlantic, June 18. ↩
Kay, Jilly Boyce(2025), "The Reactionary Turn in Popular Feminism." Feminist Media Studies, 25(8): 1853-1870.↩
Ibid., as cited in Seresin, Asa(2019), “On Heteropessimism”, The New Inquiry, October 9. ↩
경향신문 여성서사 아카이브 플랫(2025),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 도서출판 동녘.↩
손희정(2022), “기이한 열정: 디지털 시대의 고어 남성성”, 『횡단인문학』, 12, 57-83.↩
사야크 발렌시아(2021), 『고어 자본주의』, 최이슬기 옮김, 워크룸프레스.↩
Davis, Oliver, and Tim Dean(2022), Hatred of Sex, U of Nebraska Press.↩
홍보람(2021), “가시성의 경제와 몸 이미지: BL은 어떻게 페미니즘의 ‘문제’가 되었는가”, 『여/성이론』, (44), 42-73.↩
Kay, Jilly Boyce, op. cit.↩
Kim, Bohyeong(2025), “Feminist Economicus: Popular Feminism, Popular Finance, and the Making of the Economic Woman in South Korea”, Cultural Studies, 1-24.↩
마크 피셔(2024),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Kay, Jilly Boyce, op. cit., p.1866.↩
Ibid., p.16.↩
https://www.instagram.com/ward.gaza.queer/↩
Liu, Petrus(2022), The Specter of Materialism: Queer Theory and Marxism in the Age of the Beijing Consensus, Duke University Press, p.23.↩
3호(2025.12.) l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 l 신진연구
페미니즘의 부정성과 마주하기
홍보람
몇 주 전 트위터에서, 돌이켜보니 ‘미러링’이고 ‘리부트’고 그저 다 남초 커뮤니티의 여성적 데칼코마니에 불과했던 것 같다는 회한 어린 트윗을 마주하고 북마크를 누른 뒤 생각에 잠겼다. 미러링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애초에 의도했던 소격효과라는 기원은 사라지고 반사적 제스처만 몸에 붙어 윤리적 제어 없이 루키즘을 발사하는 게 유사 페미니즘으로 여겨진 지도 이미 오래되었을까? 어느 논바이너리 트랜스의 성별 정정 소식 트윗에 300개 이상의 비난 인용이 붙는 여전한 트랜스 혐오와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관계는 충분히 조명이 되었던가? 극우 정치인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선출을 여성의 이름으로 공식 환영하는 여성의당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어두운 일면 정도로 여기고 지나가면 되는 걸까…….
이런 현재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그것의 무망함을 속단하는 것만큼이나 불완전하고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페미니즘의 폭력성과 반동성을 외면하지 않는 동시에 페미니즘의 주체성과 행위성을 무효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들이 필요할까? 전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고의로 누락시키고, 후자만을 강조하는 것은 페미니즘 속에서 취약해지는 삶들이 페미니즘의 관심사가 아니며, 중요하게 고려할 만한 대상도 아니라는 선언이다. 페미니즘은 이런 선언의 반복이었고, 이에 항의하는 비백인, 제3세계, 트랜스젠더퀴어, 노동 계급, 장애 페미니스트 주체들의 비판을 통해서 페미니즘은 변혁적 운동이자 이론이자 이념으로서 스스로를 유지해 왔다.
최근 우리 시대의 반동주의와 페미니즘이 어떻게 접합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연구들은 진보적 페미니즘 대 보수적 반페미니즘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로는 현재의 문화적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젠더 비판적 페미니즘’이나 TERF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전제하는 것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구조 자체에 내재한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짚거나1, TERF로 당장 활동하지 않으며 다양한 젠더에 우호적인 ‘시스 페미니즘’이 어떻게 트랜스포비아로 전환될 가능성을 배양하고 있는지 분석하기도 한다.2 이러한 연구들이 “페미니즘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정치적 선(善)으로 찬양하는 서사”3를 지양하는 데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는 까닭은 페미니즘이 반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반 파시스트 조직화를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게끔 하기 때문이다.4 마찬가지로 이 글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대중화된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우경화의 단초들을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 것’으로 솎아 내거나 특정 소수 집단의 경향으로 구획하기보다, 오히려 이 단초들을 통해서 페미니즘 자체를 재고하고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가늠해 보려 한다.
대중적 페미니즘과 가시성의 경제: 페미니즘 티셔츠가 정치가 될 때
2015년 무렵부터 그 이후 몇 년간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여느 때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인기 있었던’ 시대였다. 각종 온라인 해시태그 운동, 페미사이드와 디지털 성 착취에 반대하여 수만 명이 결집한 집회들, 2016년 소라넷 폐지를 이끈 활동들, 여성 서사는 ‘밀어주고’ 여성혐오 콘텐츠는 ‘안 사요’로 대응하는 구매력 행사의 방식들, 페미니즘 독서 모임의 번성, 페미니즘 서적과 여성 작가들의 주류화, 자신의 일상과 욕망을 ‘6B4T’라는 원칙 아래 재구축하는 실천들… 아마도 페미니즘 인기에 소구하여 따낸 가장 큰 판돈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SNS에 ‘짤’의 형태5로 게시하고 남성층의 지지를 얻으며 2022년 당선된 전 파면 대통령 사례일 것이다. 이 시기 페미니즘은 ‘쓰까’와 ‘랟펨’이라는 첨예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popular) 페미니즘’6의 동학 속에서 뒤엉켜 진동하고 있었다.
한국과 비슷한 시기 북미와 유럽에서 페미니즘이 소수 아카데믹 집단이나 특정 모임을 넘어 각종 디지털 공간과 대중 미디어, 상업 미디어의 순환되는 담론과 실천에서 나타나 인기를 얻는 양상을 분석한 사라 바넷-와이저는 이 대중적 페미니즘을 자신감 회복(empowered)과 상처(injury), 그리고 ‘가시성의 경제’를 토대로 작동하는 특수한 실천으로 정의한다. 기존 가시성의 정치가 특정한 집단을 조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밝히려는 수단으로 가시성을 활용했던 반면, 가시성의 경제는 가시성을 목적 그 자체로 전환한다. 이 경제 속에서 페미니즘이 ‘보이게 되는’ 것과 페미니즘에 돈을 쓰는 것은 곧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페미니즘 티셔츠가 바로 정치다 […]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정체화하는 것은 충분한 정치적 행동이 된다.”7 이와 마찬가지 역학으로 대중화된 여성혐오가 거울 효과처럼 작동하면서 클릭 수, 리트윗, ‘좋아요’ 등의 축적이 필요한 기술‧경제적 맥락의 미디어 풍경을 함께 만들고,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양자에 정치적 행동을 위한 공간과 자원을 제공하며 인기를 얻는다.
대중적인 가시성의 확장은 분명 페미니즘을 듣고 생각하고 말할 공간과 기회를 열지만, 또한 누가 가시성을 획득하느냐를 둘러싼 경쟁 속으로 정치를 용해한다. 어떤 해시태그를 더 많이 노출하고 누구의 이미지를 가시화하며 소비할 것인가라는 경쟁 속에서 임금, 재생산 노동, 복지 제도 개혁 같은 물질적 의제는 주변화되고 주목 경제의 가시성에 참여하는 이미지들은 트렌드에 맞춰 규범화된다. 나아가 가시성의 경제는 감시의 메커니즘에도 의존한다. 주변화된 차이의 주체들에게 주목이 가해지는 순간 이들은 훈육되고 처벌받는다. 대중적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급진적 의미를 자기 계발과 자존감의 언어로 희석하는 경향을 보이며, 결국 집단 정치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관리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재구성한다. 그럼에도 대중적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중적 페미니즘이 필요하지 않을까? 둘은 가시성의 경제 안에서 팽팽하게 맞붙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과 소비에 초점을 맞추는 대중적 페미니즘과 달리, 대중적 여성혐오는 국가‧법‧정책‧폭력 기구와 훨씬 더 촘촘히 결합해 자신의 가부장적 구조를 성공적으로 강화한다는 점에서 실상 비대칭적 관계를 이룬다. 남성성에 페미니스트들이 가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가부장제를 다시 불러 올 필요를 호소하는 극우파들의 전 지구적 가시성은 남성 일반에게 타격을 가하는 방식의 정치적 유효함을 재고하게 한다. 결국 지역‧돌봄 네트워크나 오프라인 연대와 같은 잘 보이지 않는 기층 조직화 작업이 구조 변화를 준비하는 핵심임에도, 끊임없이 브랜드화하는 주체만이 정치적 행위자로 인정되는 가시성의 경제에서는 비가시적 정치의 중요성이 퇴색한다.
가시성의 경제라는 개념은 보편적‧추상적인 인권이 한국의 대중적 페미니즘에서 왜 한정된 파이를 나누는 문제이자 피해자성의 경합으로 이해되었는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아프며, 트랜스젠더퀴어이거나, 남성에게 여전한 애착을 갖는 실제적인 여성들의 삶은 ‘정상에서 만날’ 여성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퇴보시키는 위험한 이미지로 여겨지며 훈육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남성들이 자신들의 불안과 박탈감을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돌리며 가부장적 구조를 미디어 시장, 대학 사회, 정치계까지 촘촘하게 강화하는 동안, 지난 10년 재부상한 페미니즘이 ‘여성 연대’를 외치면서도 현장과 활동들에 충분히 연결되지 못한 채 개별화된 실천 속에서 흩어진 상황은 가시성의 경제를 곧 정치로 치환했을 때의 한계를 재고하게 한다.
반동적 페미니즘의 “반희망적 감정 구조”와 미시 파시즘적 욕망
생물학적 본질주의 수사의 강화와 TERF의 부상, 난민 입국 반대, 우파 여성 정치인 옹호나 극우 정치와의 공조 등 대중적 페미니즘의 반동적 전환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교양지 애틀랜틱은 2023년 반동적 페미니즘(reactionary feminism)을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라는 표면상 “급진적” 전제에 기반하면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진보적 정치를 배격하는 “신흥 페미니즘 흐름”으로 명시한다.8 반동적 페미니즘은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낙태권을 주장하는 등 좌파의 외관을 갖지만 질리 케이는 이들이 실상 대안 우파나 남초 커뮤니티의 반동적 기업가 집단과 더욱 유사하다고 지적한다.9 질리 케이는 대중적 페미니즘 내 반동적 전환들이 공유하는 근본적인 특징을 다음처럼 밝힌다. 첫째, 생물학적 본질주의. 둘째, “반희망적 감정 구조”라는 공격적 운명론. 셋째, 페미니즘, 계급, 공동체에 대한 수사적인 호소.
두 번째 특징인 반희망적 감정 구조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에서 기인한다. 이 본질주의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폭력을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고정된 성별을 여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체념하는 운명론이기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운명론이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성애 비관적 감정 구조는 세레신이 리 에델만을 인용하여 말하는 “마취적 감정”, 즉 “감정의 과도한 강렬함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감정”의 양성을 수반한다.10 이는 “이성애 문화에 만연한 끔찍함과 마주하여 마음을 선제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성애 자체의 구조적 변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이 반희망적 감정 구조는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11과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한 페미사이드가 만연한 나라이자, 불법 촬영‧웹하드 카르텔‧딥페이크 등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비즈니스 모델이 되고 디지털 산업 생태계를 이루는12 “고어 자본주의”13 국가 한국에서 더욱 깊고 짙은 비관적 정동으로 나타난다. 질리 케이가 분석하는 이성애 비관주의와 마취적 감정이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관계 조절 전략이었다면, 한국의 대중적 페미니즘에서 이러한 정동은 이성애를 비롯한 성애 자체를 거부하고 탈각시키는 원천이다. “섹스에 대한 증오”14라고도 할 법한 이 현상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화하는 북미와 영국의 반동적 페미니즘과 달리 ‘디폴트 여성’이라는 추상화된 인간 모델을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접합시킨다.15
또한, 질리 케이는 이성애 비관적 감정 구조가 양성하는 마취적 감정을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상화되는 자기 마비, 금욕주의, 남성적 자제심의 성별이 뒤바뀐 거울상 표현으로 이해하자고 주장한다. 질리 케이는 ‘마비된 주체’가 ‘감각적 연결’에 대항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려고 하는 욕망 속에서 미시 파시즘적 주체성의 생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잭 브라티치의 논의를 인용한다.16 유사한 방식으로 마취적 감정을 동원하는 여성주의 커뮤니티에서도 미시 파시즘적 욕망이 조장되고 있다는 질리 케이의 주장은 ‘페미니스트 실천’을 위해 무수한 금지와 배제의 규범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뿐만 아니라 불링의 형태로 타자들을 처벌하며 전개되어 온 대중적 페미니즘의 일부 경향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마취적 감정의 역전된 성별성은 김보형이 분석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성상인 “페미니스트 이코노미쿠스”의 특징과도 맞물린다.17 한국에서 대중적 페미니즘과 대중적 금융의 융합을 통해 형성된 페미니스트 이코노미쿠스는 여성이 자제력 없는 남성에 비해 더 이성적이고 신중하며 투자에 적합하다는 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의 언어’로 남성적 합리성과 여성적 비합리성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이 과정에서 금융과 주식은 여성들에게 불안정한 도박이 아닌 보람 있는 결과를 위해 채택할 수 있는 실천으로 펼쳐지며 정당성을 강화한다.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급진’의 언어를 차용하지만 ‘여성 버핏(Woman Buffett)’으로서 금융 자본주의를 지지하며 연결과 연대를 거부하는 반동적 페미니즘의 실천들은 이성애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역시 필연적인 체계라는, 변화에 대한 반희망적 감정 구조 속에 있다. 대중적 페미니즘 내 반동적 전환은 “대안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18의 특정한 여성화된 표현”19이며, 또한, 불평등 심화, 미시 파시즘의 확산,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상상력의 광범위한 억압 등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현실적 문제들의 반응이자 증상이다.20
다른 세계를 짓는 방법
어떻게 우리는 반동적 페미니즘의 기저에 있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반희망적 감정 구조, 미시 파시즘에 균열을 내며 집합적 불만과 다른 형태의 삶을 향한 욕망의 키를 평등과 해방의 방향으로 틀 수 있을까? 이것은 페미니스트 이코노미쿠스 주체성을 열심히 실천하고 ‘여성’ 범주의 확고함을 의심치 않으며 트랜스젠더를 배격하는 일부 반동적 페미니스트들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다. 돈을 벌고 싶은 반자본주의자들, 능력주의와 성공 담론을 저주하면서 능력을 계발 중인 성실한 사람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길 선택하지만 우연한 친절로 얻은 기쁨을 종일 곱씹는 외로운 사람들, 분열하고 찢어지는 자아들,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이 끔찍한 세계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주의의 선명함은 다른 세계를 짓는 사람들과 감각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흔들리고 옅어지는 것 같다. 윤석열 퇴진 투쟁이 한창이던 올해 3월,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열린 대회에 참여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서울역 광장 계단에 앉아 故강태완 님 어머니의 발언을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각국의 음료를 나누는 트럭이 운영되었고 간단한 구호를 외친 후 차를 받을 수 있었다. 따뜻한 팔레스타인 잎차를 받아 자리로 돌아오면서, 이곳의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고 각자 다르지만, 절박한 의제를 향해 모였다는 찰나의 공통감각 속에서 숨을 쉴 수 있구나, 생각했다. 이 연약한 공통감각은 언뜻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의 입구다. 지혜복 교사, 고진수 지부장, 이스라엘이야말로 우리를 죽이고 있다고 외치는 가자지구의 퀴어들21, 기아차 화성 공장 청소 노동자들, 이 투쟁하는 사람들이 가시성의 정치를 통해 열어 준 입구들에 한 발을 내디뎌야 반희망적 감정 구조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짓는 감각에 동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연구는 피해자성의 경쟁이 아닌 취약성의 연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결국 취약성을 생산하는 구조를 밝히고 연대의 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를 개념화한 사야크 발렌시아는 고문‧시신 세력화로 남성성을 강화하는 남성 주체들을 분석하지만 이를 고정된 ‘여성’ 피해자 정체성과 연결하지 않고 트랜스 페미니즘 관점으로 확장한다. 성별에 따른 단순한 가해와 피해 이분법으로는 자본주의 폭력의 젠더화된 순환을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종화되고 식민화된 성별 비순응 인구의 취약성이 또한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많은 연구자들은 지적해 왔다. 이런 취약성의 연합이 다소 막연하고 당위적인 결론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 같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관한 다음의 질문을 더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이 필요하다. “정확히 어떻게 (사회적 의미에서) 취약성의 생산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가치의 생산과 연관될까?”22 사회적 관계로서의 경제 속에서 취약성을 경험하는 여성-트랜스-퀴어들과 함께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지금 필요한 대항 담론을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홍보람
연구노동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퀴어팔레스타인연대QK48에서 활동한다. 맑시즘/유물론과 퀴어-페미니즘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연구한다. 활동하는 동료들이 덜 소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집회 짐을 창고에서 함께 나르고 있다.
Bassi, Serena, and Greta LaFleur(2022). “Introduction: TERFs, Gender-critical Movements, and Postfascist Feminisms”, Transgender Studies Quarterly, 9(3), 311-333.↩
Amery, Fran(2025), “Three Elements of Cisfeminism: Arrogant Perception, Will to Power and Attachment”, Sexualities, 0(0), 1–15.↩
Bassi and Lafleur, op. cit., p. 313.↩
Lewis, Sophie, and Asa Seresin(2022), “Fascist Feminism: A Dialogue”, Transgender Studies Quarterly, 9(3), 463-479.↩
이리예(2025), “짤의 시대, 안티페미니즘으로 공모하는 루저 남성 정서와 정치 언어”, 『폭주하는 남성성』, 도서출판 동녘.↩
Banet-Weiser, Sarah(2018), Empowered: Popular Feminism and Popular Misogyny, Duke University Press.↩
Ibid., p.23.↩
Lewis, Helen(2023), “The Feminists Insisting That Women are Built Differently”, Atlantic, June 18. ↩
Kay, Jilly Boyce(2025), "The Reactionary Turn in Popular Feminism." Feminist Media Studies, 25(8): 1853-1870.↩
Ibid., as cited in Seresin, Asa(2019), “On Heteropessimism”, The New Inquiry, October 9. ↩
경향신문 여성서사 아카이브 플랫(2025),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 도서출판 동녘.↩
손희정(2022), “기이한 열정: 디지털 시대의 고어 남성성”, 『횡단인문학』, 12, 57-83.↩
사야크 발렌시아(2021), 『고어 자본주의』, 최이슬기 옮김, 워크룸프레스.↩
Davis, Oliver, and Tim Dean(2022), Hatred of Sex, U of Nebraska Press.↩
홍보람(2021), “가시성의 경제와 몸 이미지: BL은 어떻게 페미니즘의 ‘문제’가 되었는가”, 『여/성이론』, (44), 42-73.↩
Kay, Jilly Boyce, op. cit.↩
Kim, Bohyeong(2025), “Feminist Economicus: Popular Feminism, Popular Finance, and the Making of the Economic Woman in South Korea”, Cultural Studies, 1-24.↩
마크 피셔(2024),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Kay, Jilly Boyce, op. cit., p.1866.↩
Ibid., p.16.↩
https://www.instagram.com/ward.gaza.queer/↩
Liu, Petrus(2022), The Specter of Materialism: Queer Theory and Marxism in the Age of the Beijing Consensus, Duke University Press,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