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2026.3.) l 퀴어 공간과 지역
안전공간(safe space)의 어지러운 경계
레즈비언의 트위터 속 경계적 존재들
조예음
이 글은 2024년 여름에 나온 석사 논문 「평화롭지 않은 안전공간(safe space), 레즈비언의 트위터: 안전함의 조건과 안전공간의 경계 그리기」를 기반으로 썼습니다. 해당 학위논문은 현재 학술지 투고를 위한 작업 중에 있으며, 아래 글에서 연구 참여자를 언급하는 부분은 모두 학위논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가져왔음을 미리 밝힙니다.
트위터와 레즈비언에 관해 논문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날 레즈비언이 나오는, GV(관객과의 대화)가 포함된 영화를 보러 간 것뿐이다. 당시 많은 극장에서 GV를 진행할 때 마이크를 넘기며 대화할 수 없으니 카카오톡 오픈 채팅 방을 활용해 관객에게 질문을 받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진행자가 특이하게도 트위터를 통해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는 “여기 계신 분들이 트위터를 많이 하신다고 들어서요~”하며 웃었고, 이에 영문을 모르는 나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반응하며 극장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 공간의 많은 사람들이 레즈비언들이었고, 그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이들이 트위터를 많이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트위터라면 한 번 깔았던 적이 있지만 어떤 계정을 팔로우해야 할지, 이들이 쓰는 말이 무슨 말인지 등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금방 지웠었다. 그날을 계기로 다시 깔았을 때는 그 영화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다른 레즈비언 미디어들을 중심으로, 또 레즈비언들을 중심으로 타임라인을 꾸릴 수 있었다. 처음 트위터 속 레즈비언들과 이들의 장을 보았을 때 그 공간은 레즈비언만의 축제 현장, 편안한 놀이터 같았다. 그러다가 트위터 안의 레즈비언들끼리 싸우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얼마 안 가 사실은 허구한 날 맨날 싸운다는 것도, 나아가 사이버 불링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처음 이 공간에 관해 글을 쓸 때는 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대단한 역할을 하는지 썼다. 그때 원고를 지금 읽어보면 트위터만 있으면 세계 평화도 이룩할 수 있을 것처럼 써 놨다. 그러다 여기저기 원고를 보여드리고 여러 번 혼이 난 후에야 내가 먼저 들여다보아야 하는 질문은 한국의, 젊은, 레즈비언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특정 타임라인이 왜 ‘언제나 치고받고 싸우는 유토피아’처럼 보이는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다 보니 안전공간(safe space)이라는 개념을 들여다보게 됐다. 이어서는 안전공간 내의 긴장과 협상에 대한 문헌들을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의 레즈비언이 모인 트위터 공간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안전공간은 언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안전한가?
안전공간(safe space)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부터 여성, 퀴어, 흑인 등 주변화된 존재들이 폭력과 혐오로부터 안전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폭넓게 쓰여왔다. 많은 연구들이 안전공간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스스로와 서로에 관해 배우고 이를 언어화할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하고, 구성원들 간의 연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정치적-문화적 자원을 구축하게 해주었음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여러 연구자들이 안전공간이 가지는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안전공간에 관한 환상과는 달리, 이곳은 모든 갈등이 제거된 유토피아가 아니며, 종종 불편한 주제에 관해 논의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허울 좋은 핑계를 제공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안전공간은 한 억압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한다는 명목 아래 여러 억압의 교차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성의 안전공간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목표 아래 여성이라는 정체성 외에 다른 정체성들은 지워버리곤 하고, 퀴어의 안전공간은 백인 남성 시스젠더 게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상 규범을 만들어낸다. 한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이 다른 여성에게는 발 디딜 수 없는 곳일 수 있고, 어떤 퀴어를 위한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 안전공간은 다른 퀴어의 안전을 담보로 잡을 수도 있다. 안전공간이 언제나,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안전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전공간은 수많은 맥락의 결 안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갈등과 긴장이 내재해 있는 공간이다.
경계적(liminal) 존재들이 안전공간에 던지는 질문
안전공간이 맥락적인 특성을 가지며 그 안에 필연적으로 긴장을 품고 있다는 점은 경계적 존재들에게 안전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더 분명히 드러난다. 모라가(Moraga)는 노동자 계급의 치카나(Chicana)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자신의 위치성을 파고들며 페미니즘 안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나는 계급, 인종, 성적 지향 문제들을 지적한다. 그는 특정 억압에 함께 저항한 동지들이 다른 온갖 억압들이 함께 휘몰아칠 때 서로를 저버리게 될지,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유색인종 레즈비언들은 어떤 진영으로 후퇴해야 하는지(To whose camp, then, should the lesbian of color retreat?)” 질문을 던진다. 코야마(Koyama)는 여성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가, 정확히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womyn born womyn)”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 여성, 유색인종 여성 등 다양한 여성들을 배제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트랜스섹슈얼의 존재가 본질주의적 여성 정체성 정치에 균열을 내고, 같은 방식으로 바이나 팬 섹슈얼이 동성애 정체성 정치에, 다인종이 흑인 민족주의에 균열을 낸다고 말한다. 누가 여성, 동성애자, 흑인이며, 누가 이들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되는가? 이분법에 의해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위치 지어지는 이들의 존재는 안전공간의 경계선이 당연하지도, 단일하지도 않게 그어지며, 언제나 협상을 통해 그어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누가 내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
한국 레즈비언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누가 ‘진실되고 깨끗한 레즈비언’인지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때문에 위에서 살펴본 안전공간의 어지럽고 애매한 경계,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존재들이 어떻게 밀려나고 파편으로서 존재하고 있는지 관찰하기 적합한 공간이었다. 이성애-가부장제가 강력히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의 공간만큼은 온전히 레즈비언만의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누가 여성, 레즈비언인지 명확히 정의된다는 믿음은 레즈비언 외의 존재들을 구분해 경계 밖에 두고자 했다. 여성이 아닌 이들에게도 끌림을 느낀 적이 있거나 느낄 수도 있는 동시에 스스로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이들을 레즈비언의 경계 바깥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존재했다. 각자의 기준에 여성이 아닌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거나, 혹은 앞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덜 퀴어하고, 덜 소수자이며, 덜 차별 받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성골(聖骨) 레즈비언’을 걸러내려는 시도에 한 인터뷰 참여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개 계정에서는 남자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으며, 더 가까운 트친들만 모인 비공개 계정에서는 서로 가끔 남성에 대한 끌림도 표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어떤 부분은 트위터의 레즈비언들에게 환영받고 어떤 부분은 공격받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에 자신을 선택적으로 노출하는 식으로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배제당하지도 않았으나 온전한 자신으로서 환대받지도 않았다는 점,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특정 방식을 터득했다는 점은 안전공간이 구성원들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안전을 제공하지 않음을, 또한 안전공간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구성원들의 선택적인 침묵이 요구되기도 함을 보여준다.
경계 안에 있는 외부인
‘레즈비언끼리(만) 레즈비언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라는 규칙은 미디어를 소비할 때에도 적용됐다. 트위터에서 GL과 BL을 모두 즐기는 지정 성별 여성의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논바이너리로 본인을 소개한 한 연구 참여자는 GL 팬들이 BL팬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진짜 한 줌만이 GL인” 한국의 상황 속에서, “공식 캐릭터상으로는 HL이나 GL로 엮이는데 BL을 먹는 사람들이 이 모든 캐릭터를 (…) BL로 먹”어서 “가뜩이나 작은 판인” GL팬들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실로 다른 인터뷰 참여자는 이성애 기반 팬덤이 남성에 대한 끌림을 표현할 때 레즈비언 관계를 담은 미디어를 사용하면(예: “니가 내 캐롤(〈Carol〉)이다”) “소수자성을 훔쳐 가는 느낌”이 든다고 전했다. 박보람(2021)에 따르면 한국에서 GL을 향유하는 이들은 “GL을 중심으로 사회적 소수자로서 하위문화를 공유하는 일종의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스스로 장르의 존폐 자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남성이 포함된 관계를 담은 텍스트를 즐기는 이들을 안전공간의 경계선 바깥에 있는 외부인으로, 나아가 이 공간의 안전을 흐리는 침입자로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난다.
하지만 BL과 GL을 모두 즐기며, 논바이너리인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고,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더 많은 호감을 느낀다고 자신을 소개한 참여자와 같은 경계적 존재들에 의해 그러한 경계선들은 이미 가로질러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지인 중에는 이러한 트위터 분위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BL과 GL을 “두 개 다 파시는데 계정을 분리해가지고 이름도 바꿔서 그림체도 바꿔서 연성하”는 분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는 이 공간이 레즈비언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레즈비언이 가진 여러 모습 중 ‘충분히 레즈비언스러운’ 측면만을 허용하는, 동시에 그런 측면만 보여준다면 레즈비언이 아니어도 허용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안팎의 구분을 강화하는 트위터
앞서 이 공간의 구성원들이 동질적이지 않음을 논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트위터를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연구 참여자들은 트위터를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서클이 명확히 있"는, "버블"이며, “생각은 다 비슷비슷”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공간이 특정 언어만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용자들이 자신의 관심사 및 가치관을 반영하는 계정과 대화를 중심으로 각자의 타임라인을 큐레이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위터 내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위한 단일한 공간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수많은 개인이 각자의 타임라인을 자신만의 안전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에 가깝다.
정희진은 정체성 정치를 “동일성”의 정치가 아니라 “동일시”의 정치라고 설명한다. 모든 인간은 절대로 동일할 수 없지만, 다른 존재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동일시는 가능하다. 동일시 자체는 문제적이지 않지만, 동일시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를 통해 안전공간을 만들어갈 때 발생하는 정체성의 본질화나 특정 집단의 권리 우선은 문제적이다. 또한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서로 부딪치고 부대껴야 하는 순간들이 있는 반면, 트위터와 같은 온라인 안전공간에서는 팔로우/언팔로우, 차단 등을 통해 손쉽게 원하는 만큼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하다. 정체성 정치에만 기대어 안전공간을 만들어 나갈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 온라인 안전공간에서는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
처음 이 공간에 대한 글을 썼을 때와 달리 지금 나는 이 공간을 매일 축제가 벌어지는 유토피아로 쓸 수 없고, 그렇다고 반대로 허구한 날 싸우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는 공간으로도 쓸 수 없다. 어떤 안전공간도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는 충분하게 쓰이지 못할 것이다. 이 공간을 비롯해 어떤 안전공간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그 공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허락되고/제한되는 언어는 무엇인지, 개인들은 이 공간의 규범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이곳의 안이나 바깥, 혹은 둘 중 어디도 아닌 곳에 존재하는 이는 누구이며 그곳에서 어떤 실천을 만들어내는지를 함께 질문해야만 한다.
덧붙이자면 퀴어의 안전공간을 꾸려갈 때도 우리는 위의 질문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웹진의 창간호에서 전혜은은 다음과 같이 썼다. “‘문턱’으로 불리는 공간은 명확하게 이름 붙여진 범주들보다 훨씬 더 넓고 광대한데도, 지배적 인식장에서 이 공간은 그저 문 ‘안’과 ‘밖’이라는 범주를 구분하기 위해서만 가시화될 뿐 항상 왜곡되고 텅 비어 보인다. 사실은 이분법적 범주에 맞지 않는 모든 존재가 밀려와 바글거리는 곳임에도”. 누가 어떤 퀴어의 공간에서도 온전한 자신으로서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가? 수많은 경계선들에 걸쳐진 몸으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텅 비어 보”이는 공간 속 “바글거”림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지, 무엇보다 더 많은 이들이 발 딛고 살 수 있는 땅을 찾을 수 있지 않을지, 감히 바라 본다.
조예음
한국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트위터 공간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돈이 없어서 박사를 못/안 갔더니 독립연구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Austin, A., Craig, S. L., Navega, N., & McInroy, L. B.(2020), “It’s my safe space: The life-saving role of the internet in the lives of transgender and gender diverse youth”, International Journal of Transgender Health, 21(1), 33–44; Nuru, A. K., & Arendt, C. E.(2019), “Not So Safe a Space: Women Activists of Color’s Responses to Racial Microaggressions by White Women Allies”, Southern Communication Journal, 84(2), 85–98.↩
Quinan, C.(2016), "Critical Concepts in Queer Studies and Education ." In N. M. Rodriguez, W. J. Martino, J. C. Ingrey, & E. Brockenbrough (Eds.), Safe Space. (pp. 361–368). Palgrave Macmillan US.↩
Valentine, G., & Skelton, T.(2003), “Finding oneself, losing oneself: The lesbian and gay ‘scene’ as a paradoxical space”, International Journal of Urban and Regional Research, 27(4), 849–866.↩
McCready, L. T.(2004), “Some Challenges Facing Queer Youth Programs in Urban High Schools: Racial Segregation and De-Normalizing Whiteness”, Journal of Gay & Lesbian Issues in Education, 1(3), 37–51; Kokozos, M., & Gonzalez, M.(2020), “Critical Inclusion: Disrupting LGBTQ Normative Frameworks in School Contexts”, Equity & Excellence in Education, 53(1–2), 151–164.↩
The Roestone Collective(2014), “Safe Space: Towards a Reconceptualization”, Antipode, 46(5), 1346–1365. ↩
Moraga, C.(1981), “La Güera”. in C. Moraga & G. Anzaldúa (Eds.), This Bridge Called My Bac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4-33.↩
Koyama, E.(2020), “Whose feminism is it anyway? The unspoken racism of the trans inclusion debate”, The Sociological Review, 68(4), 735-744. ↩
박보람(2021), 「퀴어 여성 GL 향유자들의 문화실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
정희진(2018),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권김현영,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서울: 교양인, 201–236. ↩
전혜은(2025), “한국에서 퀴어 이론/번역하기: 경계적 존재가 살아남고 살아가는 그저 한 가지 방법”, 한국성소수자/퀴어연구학회 웹진 『도착』, (1). ↩
4호(2026.3.) l 퀴어 공간과 지역
안전공간(safe space)의 어지러운 경계
레즈비언의 트위터 속 경계적 존재들
조예음
이 글은 2024년 여름에 나온 석사 논문 「평화롭지 않은 안전공간(safe space), 레즈비언의 트위터: 안전함의 조건과 안전공간의 경계 그리기」를 기반으로 썼습니다. 해당 학위논문은 현재 학술지 투고를 위한 작업 중에 있으며, 아래 글에서 연구 참여자를 언급하는 부분은 모두 학위논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가져왔음을 미리 밝힙니다.
트위터와 레즈비언에 관해 논문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날 레즈비언이 나오는, GV(관객과의 대화)가 포함된 영화를 보러 간 것뿐이다. 당시 많은 극장에서 GV를 진행할 때 마이크를 넘기며 대화할 수 없으니 카카오톡 오픈 채팅 방을 활용해 관객에게 질문을 받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진행자가 특이하게도 트위터를 통해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는 “여기 계신 분들이 트위터를 많이 하신다고 들어서요~”하며 웃었고, 이에 영문을 모르는 나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반응하며 극장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 공간의 많은 사람들이 레즈비언들이었고, 그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이들이 트위터를 많이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트위터라면 한 번 깔았던 적이 있지만 어떤 계정을 팔로우해야 할지, 이들이 쓰는 말이 무슨 말인지 등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금방 지웠었다. 그날을 계기로 다시 깔았을 때는 그 영화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다른 레즈비언 미디어들을 중심으로, 또 레즈비언들을 중심으로 타임라인을 꾸릴 수 있었다. 처음 트위터 속 레즈비언들과 이들의 장을 보았을 때 그 공간은 레즈비언만의 축제 현장, 편안한 놀이터 같았다. 그러다가 트위터 안의 레즈비언들끼리 싸우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얼마 안 가 사실은 허구한 날 맨날 싸운다는 것도, 나아가 사이버 불링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처음 이 공간에 관해 글을 쓸 때는 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대단한 역할을 하는지 썼다. 그때 원고를 지금 읽어보면 트위터만 있으면 세계 평화도 이룩할 수 있을 것처럼 써 놨다. 그러다 여기저기 원고를 보여드리고 여러 번 혼이 난 후에야 내가 먼저 들여다보아야 하는 질문은 한국의, 젊은, 레즈비언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특정 타임라인이 왜 ‘언제나 치고받고 싸우는 유토피아’처럼 보이는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다 보니 안전공간(safe space)이라는 개념을 들여다보게 됐다. 이어서는 안전공간 내의 긴장과 협상에 대한 문헌들을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의 레즈비언이 모인 트위터 공간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안전공간은 언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안전한가?
안전공간(safe space)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부터 여성, 퀴어, 흑인 등 주변화된 존재들이 폭력과 혐오로부터 안전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폭넓게 쓰여왔다. 많은 연구들이 안전공간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스스로와 서로에 관해 배우고 이를 언어화할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하고, 구성원들 간의 연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정치적-문화적 자원을 구축하게 해주었음을 보여주었다.1
동시에 여러 연구자들이 안전공간이 가지는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안전공간에 관한 환상과는 달리, 이곳은 모든 갈등이 제거된 유토피아가 아니며, 종종 불편한 주제에 관해 논의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허울 좋은 핑계를 제공하기도 한다.2 무엇보다 안전공간은 한 억압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한다는 명목 아래 여러 억압의 교차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성의 안전공간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목표 아래 여성이라는 정체성 외에 다른 정체성들은 지워버리곤 하고,3 퀴어의 안전공간은 백인 남성 시스젠더 게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상 규범을 만들어낸다.4 한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이 다른 여성에게는 발 디딜 수 없는 곳일 수 있고, 어떤 퀴어를 위한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 안전공간은 다른 퀴어의 안전을 담보로 잡을 수도 있다. 안전공간이 언제나,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안전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전공간은 수많은 맥락의 결 안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갈등과 긴장이 내재해 있는 공간이다.5
경계적(liminal) 존재들이 안전공간에 던지는 질문
안전공간이 맥락적인 특성을 가지며 그 안에 필연적으로 긴장을 품고 있다는 점은 경계적 존재들에게 안전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더 분명히 드러난다. 모라가(Moraga)는 노동자 계급의 치카나(Chicana)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자신의 위치성을 파고들며 페미니즘 안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나는 계급, 인종, 성적 지향 문제들을 지적한다.6 그는 특정 억압에 함께 저항한 동지들이 다른 온갖 억압들이 함께 휘몰아칠 때 서로를 저버리게 될지,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유색인종 레즈비언들은 어떤 진영으로 후퇴해야 하는지(To whose camp, then, should the lesbian of color retreat?)” 질문을 던진다. 코야마(Koyama)는 여성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가, 정확히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womyn born womyn)”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 여성, 유색인종 여성 등 다양한 여성들을 배제한다고 비판한다.7 그는 트랜스섹슈얼의 존재가 본질주의적 여성 정체성 정치에 균열을 내고, 같은 방식으로 바이나 팬 섹슈얼이 동성애 정체성 정치에, 다인종이 흑인 민족주의에 균열을 낸다고 말한다. 누가 여성, 동성애자, 흑인이며, 누가 이들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되는가? 이분법에 의해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위치 지어지는 이들의 존재는 안전공간의 경계선이 당연하지도, 단일하지도 않게 그어지며, 언제나 협상을 통해 그어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누가 내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
한국 레즈비언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누가 ‘진실되고 깨끗한 레즈비언’인지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때문에 위에서 살펴본 안전공간의 어지럽고 애매한 경계,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존재들이 어떻게 밀려나고 파편으로서 존재하고 있는지 관찰하기 적합한 공간이었다. 이성애-가부장제가 강력히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의 공간만큼은 온전히 레즈비언만의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누가 여성, 레즈비언인지 명확히 정의된다는 믿음은 레즈비언 외의 존재들을 구분해 경계 밖에 두고자 했다. 여성이 아닌 이들에게도 끌림을 느낀 적이 있거나 느낄 수도 있는 동시에 스스로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이들을 레즈비언의 경계 바깥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존재했다. 각자의 기준에 여성이 아닌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거나, 혹은 앞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덜 퀴어하고, 덜 소수자이며, 덜 차별 받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성골(聖骨) 레즈비언’을 걸러내려는 시도에 한 인터뷰 참여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개 계정에서는 남자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으며, 더 가까운 트친들만 모인 비공개 계정에서는 서로 가끔 남성에 대한 끌림도 표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어떤 부분은 트위터의 레즈비언들에게 환영받고 어떤 부분은 공격받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에 자신을 선택적으로 노출하는 식으로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배제당하지도 않았으나 온전한 자신으로서 환대받지도 않았다는 점,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특정 방식을 터득했다는 점은 안전공간이 구성원들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안전을 제공하지 않음을, 또한 안전공간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구성원들의 선택적인 침묵이 요구되기도 함을 보여준다.
경계 안에 있는 외부인
‘레즈비언끼리(만) 레즈비언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라는 규칙은 미디어를 소비할 때에도 적용됐다. 트위터에서 GL과 BL을 모두 즐기는 지정 성별 여성의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논바이너리로 본인을 소개한 한 연구 참여자는 GL 팬들이 BL팬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진짜 한 줌만이 GL인” 한국의 상황 속에서, “공식 캐릭터상으로는 HL이나 GL로 엮이는데 BL을 먹는 사람들이 이 모든 캐릭터를 (…) BL로 먹”어서 “가뜩이나 작은 판인” GL팬들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실로 다른 인터뷰 참여자는 이성애 기반 팬덤이 남성에 대한 끌림을 표현할 때 레즈비언 관계를 담은 미디어를 사용하면(예: “니가 내 캐롤(〈Carol〉)이다”) “소수자성을 훔쳐 가는 느낌”이 든다고 전했다. 박보람(2021)에 따르면 한국에서 GL을 향유하는 이들은 “GL을 중심으로 사회적 소수자로서 하위문화를 공유하는 일종의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스스로 장르의 존폐 자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8 이런 맥락에서 남성이 포함된 관계를 담은 텍스트를 즐기는 이들을 안전공간의 경계선 바깥에 있는 외부인으로, 나아가 이 공간의 안전을 흐리는 침입자로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난다.
하지만 BL과 GL을 모두 즐기며, 논바이너리인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고,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더 많은 호감을 느낀다고 자신을 소개한 참여자와 같은 경계적 존재들에 의해 그러한 경계선들은 이미 가로질러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지인 중에는 이러한 트위터 분위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BL과 GL을 “두 개 다 파시는데 계정을 분리해가지고 이름도 바꿔서 그림체도 바꿔서 연성하”는 분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는 이 공간이 레즈비언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레즈비언이 가진 여러 모습 중 ‘충분히 레즈비언스러운’ 측면만을 허용하는, 동시에 그런 측면만 보여준다면 레즈비언이 아니어도 허용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안팎의 구분을 강화하는 트위터
앞서 이 공간의 구성원들이 동질적이지 않음을 논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트위터를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연구 참여자들은 트위터를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서클이 명확히 있"는, "버블"이며, “생각은 다 비슷비슷”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공간이 특정 언어만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용자들이 자신의 관심사 및 가치관을 반영하는 계정과 대화를 중심으로 각자의 타임라인을 큐레이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위터 내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위한 단일한 공간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수많은 개인이 각자의 타임라인을 자신만의 안전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에 가깝다.
정희진9은 정체성 정치를 “동일성”의 정치가 아니라 “동일시”의 정치라고 설명한다. 모든 인간은 절대로 동일할 수 없지만, 다른 존재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동일시는 가능하다. 동일시 자체는 문제적이지 않지만, 동일시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를 통해 안전공간을 만들어갈 때 발생하는 정체성의 본질화나 특정 집단의 권리 우선은 문제적이다. 또한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서로 부딪치고 부대껴야 하는 순간들이 있는 반면, 트위터와 같은 온라인 안전공간에서는 팔로우/언팔로우, 차단 등을 통해 손쉽게 원하는 만큼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하다. 정체성 정치에만 기대어 안전공간을 만들어 나갈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 온라인 안전공간에서는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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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공간에 대한 글을 썼을 때와 달리 지금 나는 이 공간을 매일 축제가 벌어지는 유토피아로 쓸 수 없고, 그렇다고 반대로 허구한 날 싸우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는 공간으로도 쓸 수 없다. 어떤 안전공간도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는 충분하게 쓰이지 못할 것이다. 이 공간을 비롯해 어떤 안전공간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그 공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허락되고/제한되는 언어는 무엇인지, 개인들은 이 공간의 규범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이곳의 안이나 바깥, 혹은 둘 중 어디도 아닌 곳에 존재하는 이는 누구이며 그곳에서 어떤 실천을 만들어내는지를 함께 질문해야만 한다.
덧붙이자면 퀴어의 안전공간을 꾸려갈 때도 우리는 위의 질문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웹진의 창간호에서 전혜은은 다음과 같이 썼다. “‘문턱’으로 불리는 공간은 명확하게 이름 붙여진 범주들보다 훨씬 더 넓고 광대한데도, 지배적 인식장에서 이 공간은 그저 문 ‘안’과 ‘밖’이라는 범주를 구분하기 위해서만 가시화될 뿐 항상 왜곡되고 텅 비어 보인다. 사실은 이분법적 범주에 맞지 않는 모든 존재가 밀려와 바글거리는 곳임에도”.10 누가 어떤 퀴어의 공간에서도 온전한 자신으로서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가? 수많은 경계선들에 걸쳐진 몸으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텅 비어 보”이는 공간 속 “바글거”림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지, 무엇보다 더 많은 이들이 발 딛고 살 수 있는 땅을 찾을 수 있지 않을지, 감히 바라 본다.
조예음
한국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트위터 공간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돈이 없어서 박사를 못/안 갔더니 독립연구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Austin, A., Craig, S. L., Navega, N., & McInroy, L. B.(2020), “It’s my safe space: The life-saving role of the internet in the lives of transgender and gender diverse youth”, International Journal of Transgender Health, 21(1), 33–44; Nuru, A. K., & Arendt, C. E.(2019), “Not So Safe a Space: Women Activists of Color’s Responses to Racial Microaggressions by White Women Allies”, Southern Communication Journal, 84(2), 85–98.↩
Quinan, C.(2016), "Critical Concepts in Queer Studies and Education ." In N. M. Rodriguez, W. J. Martino, J. C. Ingrey, & E. Brockenbrough (Eds.), Safe Space. (pp. 361–368). Palgrave Macmillan US.↩
Valentine, G., & Skelton, T.(2003), “Finding oneself, losing oneself: The lesbian and gay ‘scene’ as a paradoxical space”, International Journal of Urban and Regional Research, 27(4), 849–866.↩
McCready, L. T.(2004), “Some Challenges Facing Queer Youth Programs in Urban High Schools: Racial Segregation and De-Normalizing Whiteness”, Journal of Gay & Lesbian Issues in Education, 1(3), 37–51; Kokozos, M., & Gonzalez, M.(2020), “Critical Inclusion: Disrupting LGBTQ Normative Frameworks in School Contexts”, Equity & Excellence in Education, 53(1–2), 151–164.↩
The Roestone Collective(2014), “Safe Space: Towards a Reconceptualization”, Antipode, 46(5), 1346–1365. ↩
Moraga, C.(1981), “La Güera”. in C. Moraga & G. Anzaldúa (Eds.), This Bridge Called My Bac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4-33.↩
Koyama, E.(2020), “Whose feminism is it anyway? The unspoken racism of the trans inclusion debate”, The Sociological Review, 68(4), 735-744. ↩
박보람(2021), 「퀴어 여성 GL 향유자들의 문화실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
정희진(2018),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권김현영,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서울: 교양인, 201–236. ↩
전혜은(2025), “한국에서 퀴어 이론/번역하기: 경계적 존재가 살아남고 살아가는 그저 한 가지 방법”, 한국성소수자/퀴어연구학회 웹진 『도착』,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