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26.3)]서로를 퀴어링하는 지역성과 성소수자

 4호(2026.3.)  l  퀴어 공간과 지역

서로를 퀴어링하는 지역성과 성소수자

 “섬-소수자의 연결된 삶 만들기: 제주시 게이 술집의 사례를 통하여”에 관한 소회

신경준



애초의 스스로에 대한 제안: 지역의 집합적인 퀴어링을 읽기

우리가 지역에서 나타나는 퀴어링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화적으로 척박하다고 그려지는 지방에서의 성소수자들이 살아 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독해해야 할까? 내 연구는 그러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성소수자들에게 중력처럼 작용하는 대도시-서울에서의 삶의 이미지와 그 변방에 위치하는 섬-제주가 어떻게 관계하며, 또 그 대도시규범성이라는 중력에 단지 이끌리는 것만은 아닌 성소수자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대도시규범성(metronormativity)은 핼버스탬이 그의 저서 In a Queer Time and Place: Transgender Bodies, Subcultural Lives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퀴어 문화가 결핍된 시골에서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도시로 이주하는 성소수자의 전형적인 서사가 보여주듯, 성소수자에게 대도시적 삶의 조건이 일종의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 사실 이와 유사한 연구 주제는 이미 여러 번 석사학위 논문에서 시도된 바가 있는데, 마침 제주로 이주한 내게도 학술지 논문으로 쓰기에 적당한 당위와 적당한 규모를 띤 주제이기도 하였다. 특히 연구 대상이 되는 지역적 특성과 성소수자가 절합하면서 서로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여러 학제에 걸쳐 학술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지역 성소수자를 연구하는 작업들을 읽으며 혹시 이 작업들이 어떤 퀴어링을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까 질문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 부분을 내가 채우길 바라는 것이 당시 욕심이었다.

회고해 보자면 그때에는 지역적 퀴어링을 관찰하고자 할 때 생기는 사각지대가 성소수자와 이들의 하위문화를 중점적으로 참여 관찰하는 과정에서 이 성소수자의 곁을 누가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쳐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닐지 추측하였다. 대도시규범적인 서울이 문화적이고 물질적인 거대한 배치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역적 성소수자 연구를 할 때도 단지 지역 성소수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주조하는 배치로서 주변의 관계적인 복합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 보았다. 또 지역적 조건은 단지 척박하거나, 보수적인 분위기인 것만은 아니라, 그곳에 이미 오래도록 살아왔던 삶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따라서 성소수자는 지역적 조건을 단순하게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조건과 타협하거나 회피하거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또 그 조건을 변용해 왔을 것이라 그려보고 싶었다. 그러한 관점을 취한다면 연구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앨라이와 같은 주변인들, 어쩌면 삶을 함께해 온 그냥 ‘일반’ 친구들, ‘지나치게 가까운’ 이웃도 포함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지역적 존재들이 성소수자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을 때, 이들은 당연히도 지역 성소수자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퀴어링되기만 하는 대상은 아닐 것이다. 나는 되도록 다자가 조우하여 발생하는 퀴어링의 모습을 지역의 성소수자가 문화적으로 지체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긍심 운동을 통해 진보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식의 단선적인 모델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모델은 지역을 연구로 나타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울-지역의 위계적 구도를 다시금 재생산하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대도시적 환경이 친-성소수자적이며 선진적인 담론을 먼저 받아들이는 반면, 지방의 성소수자는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하여 무지·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전형적인 관념이 나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전반에 여전히 깔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서울로 떠나는 자와 지역의 부족한 문화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삶을 일구어 나가는 자라는 두 모습 외에 어떤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성소수자가 다종다양하게 집중되어 있는 서울을 향하여 이주하고 자리를 잡는 방식이 아니라, 이유가 무엇이든 아무튼 지금 여기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성소수자는 복수의 공간 혹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를 발견하고 그곳을 퀴어적인 삶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그렇다면 그 사이가 틈의 존재와 성소수자가 만나 서로를 퀴어하게 만드는 과정이고, 이 모습이 대도시규범성의 서울이라는 빛나는 이미지에 가려 제대로 포착되기 어려웠던 지역적 퀴어링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나는 지역과 성소수자를 연구할 때,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그 퀴어라는 개념이 지역성과 만나 다시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하는 퀴어링을 발견하는 연구 관점을 제안하고 싶었다. 만약 대도시규범성을 인용하여 서울-지방 간 현상을 비판할 때, 규범으로 작동하는 이상적인 대도시 퀴어됨이 아닌 삶의 양식은 지역성과의 변용 과정에서 탐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실천은?: 제주-퀴어링을 파편적으로 독해하기

제주에서의 성소수자와 퀴어링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기 위하여 구도심에 몰려 있는 여러 게이바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 단지 게이인 내가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한 곳을 골라 찾아간 것이고 진보적 서사가 아닌 것을 찾고자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사실 어떤 지역이든 간에 그 지역의 퀴어링에 대한 총체성을 읽어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를 들어 나의 경험을 되돌아보자면 처음 제주에 이주했을 때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제주는 소위 시내권이라고 하는 도시 지역과 농어촌 지역의 삶의 양식이 서로 다른 복합적인 지역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그리고 각 성소수자 정체성에 따라서도 완전히 다르게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은 게이바, 제주 퀴어문화축제나 문화 행사 등 매우 한정된 곳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게이바조차 ‘전부’를 알아낼 수는 없었는데, 1년 정도의 참여 관찰의 기간에도 연구 참여자들 간의 친소 관계로 인해 접근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여 관찰 기간 동안 학회에서 발표하여 들었던 코멘트 중에는 육지에서 게이바를 찾는 관광객의 태도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는 코멘트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만남을 반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기에 그마저도 수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처음에 가졌던 문제의식이자 스스로에게 주문했던 연구 방향이었던 지역적 퀴어링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은 사실상 거의 수행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내가 평생을 수도권에서 살아온 대도시가 사실은 복합적이기보다는 역설적으로 대규모 상권, 업무 지역, 주거 지역으로 일률적으로 편성되어 있음에 의한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타 지역 역시도 중앙 구역을 향하여 나머지 주변부 구역이 향하고 있는 구성일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 성소수자로 생활했던 방식을 제주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무심코 전제하고 있었다. 중앙의 존재를 시작점으로 하여 점차 주변부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사실 제주는 그러한 수직적 구도보다도 수평적이지만 촘촘하게 연결된 사회에 가까웠다. 연구 설계와 수행에 있어 한계를 느끼고 나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작업은 부분적으로 접근 가능한 곳을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지역적 퀴어링은 단일한 지역성이 아니라 복수의 지역성과 복수의 주체들이 만나는 복잡다단한 살아내기의 틈새를 일구는 과정일 것이라는 애초의 생각을 중점에 두기로 하였다. 대도시규범성은 성소수자에게 문화적 중력으로서 작동하는 것을 넘어, 성소수자로 하여금 불안이라는 정동으로 미래에 관한 결정을 특정하게 정렬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다채롭게 주조하는 틈새는 그 규범적 이상과는 다르게 지낼 수 있는 길을 낸다. 나는 여러 가능한 길 중 하나를 간신히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인류학적 연구를 함에 있어 원론적인 말일 수 있지만 그렇게 나는 무엇을 ‘안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엇을 만나게 되는가로 돌아간다. 수도권에서 평생을 살았고 이태원과 종로, 대학 퀴어 동아리 생활을 경험해 온 나는 과연 ‘퀴어하다’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제주의 게이바에서 일 년간 참여 관찰을 한 이래로 나는 제주와 제주 게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보다 나는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의 접점에서 나타나는 지역적 퀴어링을 읽고자 하였다. 파편적으로 읽기는 대상의 원본성을 찾아 내려가 서술하는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보다 우연적이거나 창발적인 관계를 만드는 ‘곁’의 읽기가 될 수 있다. 내가 만난 파편성은 누군가에겐 과도하게 느껴지는 인간관계의 밀집성, 또는 제주어로는 친인척 관계를 의미하는 ‘궨당 문화’였다. 옆집 숟가락 숫자도 다 꿰고 있다고 하는 궨당 문화는 주체의 젠더나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이 도시인지 농어촌인지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 그리고 특정한 한 사람에게도 낮과 밤, 장소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여 효과가 나타난다는 걸 나는 만나게 되었다. 제주 게이바 사람들은 밤과 낮을 오가며 변하는, 마치 만조가 지나면 전에 보이지 않았던 땅이 드러나듯, 변화하는 궨당 문화와 만나 이상한(퀴어한) 친족을 만들고 있다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올 연구자가 또 다른 파편과 만나기를 바라면서 연구를 마쳤다.

 

그 이후의 고민: 무엇이 나를 퀴어하게 만드는가?

생산 산업이 부재한 섬, 멀리 떨어진 섬, 힐링 관광의 섬, 도시적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정한 섬과 같이 제주에 관한 전형적인 이미지와 지리적인 배치는 어쩌면 대도시와는 다른 여러 가지 퀴어됨을 이미 만들어 내고 왔을 것이다. 섬이라는 특수한 조건은 소위 ‘본토’와 분리된 예외 지역처럼 인식하게 하고 또 제주는 그렇게 취급된다. 이같이 ‘자연적인’ 혹은 ‘비어 있음’은 제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규범적 방식과는 다른 실험적인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대안적 상상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게이바에 관한 연구를 마친 후, 한동안 제주와 퀴어성의 관계에 관한 고민을 그다지 떠올리지 않았다. 아마도 제주에서 사는 데 있어 대도시의 그 퀴어 문화에 대한 결핍감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단 내가 속한 대학원에서는 퀴어 이론, 마치 퀴어와 같이 장애됨의 모욕적 기표를 전복적으로 재전유하고자 하는 크립(crip) 이론을 주요 읽기 텍스트로 배치한 과목이 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의 어떠한 구성원도 성소수자를 포함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하여 폭력적인 언행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단지 내가 속한 사회학과라는 분과적 특성상 구성원이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넘어 나를 비롯한 새로운 사람에게 훨씬 더 적극적인 이해와 포용의 자세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상한’ 구성원을 환대하고 있었다. 내가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여기를 퀴어한 곳으로 만든다기보다는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이미 퀴어하게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퀴어하게 만드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이것이 게이바 연구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삶에서 만난 지역적인 퀴어함이었다.

제주가 퀴어를 특별하게 환대하는 지역이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제주는 다른 지역과는 비슷하게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보수성이 있으며, 특유의 여성 혐오, 외부인을 배척하는 문화가 존재하기도 한다. 다만 제주에서의 삶이 그러하듯 어떤 지역에서도 퀴어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아내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는 점, 퀴어 연구자가 이를 적극적으로 의미화하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퀴어성이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곳이 있을까? 푸코는 『성의 역사 1』에서 말한 듯이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하였고2, 버틀러는 『젠더 허물기』에서 퀴어는 폐허 위에서 삶을 재건하는 방식을 찾아간다고 하였다.3 나에게 서울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공기가 질식하게 만드는 공간이었지만, 서울을 벗어나 만난 제주는 망가진 삶을 재건해 주는 공간이 되었다. 연구자이자 성소수자인 나에게 제주는 지역적 퀴어링을 적극적으로 독해해 보고자 하는 곳이 된 동시에, 폐허가 된 내 삶을 퀴어링하는 공간이 되었다. 연구의 대상이었던 제주는 이미 나를 퀴어링하고 있었다. 게이바에서의 퀴어한 궨당, 그리고 이미 퀴어하게 있는 공동체에 속해 보는 것은 어쩌면 푸코가 말하는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 즉 ‘삶의 양식으로서의 우정’(friendship as a way of life)을4 찾는 방법인 것이다.


신경준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석사과정에서 정신병리에 관한 인류학을 공부하였고, 3년 전 제주에 와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바다 및 인프라 생태와 퀴어 이론의 접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합니다.


  1. Halberstam, Judith(2005). In a Queer Time and Place: Transgender Bodies, Subcultural Lives. New York University Press.

  2. 푸코, 미셸(2020).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3. 버틀러, 주디스(2015).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4. Foucault, Michel(1996). “Friendship as a Way of Life,” Foucault Live: Collected Interviews, 1961-1984, S. Lotringer (Ed.), 208-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