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2026.3.) l 퀴어 공간과 지역
전북의 퀴어들이 살아내는 엉겨든 깃발의 시간
조용화
함께 머무르자. 지금, 여기, 전주에.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반 무렵, 샤워 도중 트위터를 보다 몸이 마를 때까지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12월 4일 새벽, 서울로, 국회로 올라가야 할지, 자료 따위를 옮겨야 할지, 숨어야 할지, 다른 이들처럼 고양이를 부탁하고 짐을 싸고 짝꿍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몸들이 전주 충경로사거리 앞에서 9시 긴급집회를 하기로 정했을 때, 그제야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는 정체화 이후 내 몸 위에 보호막처럼 달라붙어 있던 화장도 하지 못한 채 경찰 수십 명이 붙은 곳으로 걸었다. 12월 5일, 트위터를 통해 서울 소식을 분 단위로 확인했다. 전주에서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 시민들이 약간 붙은 규모의 집회를 이어가는 동안, 3일 밤 그리고 4일 새벽과 똑같은,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란 질문을 죄책감처럼 되새겼다.
12월 6일, 서울 광장을 향한 부러움에 몸서리쳤다. 화면 너머 그곳엔 무지개 깃발들이 넘실대는 무지개존이 있었다. 보이는 퀴어들과 평등수칙을 띄우는 전광판이 있었다. 환상 같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내겐 그게 절실했다. 환상이라도 붙잡아야 견딜 수 있을 테니. 12월 7일, 단체버스를 타고 처음 서울로 갔다. 여의도에는 사람이 파도처럼 흘렀다. 전북처럼 집회에 오는 사람들이 더 있는지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몸들이 넘실댔다. 무지개존을 찾았다. 사람들 너머에 있었다. 벽처럼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사람이 쏟아지고, 나는 건너갈 수 없는 무지개존을 바라볼 수 있는 섬 같은 화단 위에 자리 잡았다. 어떤 이가 커밍아웃하며, 더는 광장의 혐오가 여성과 소수자를 지워내지 못하도록 하자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수많은 페미니스트, 소수자 단체들의 깃발이 보인다며 깃발을 흔들어달라고 했다. 동시에 옆에서 어떤 이들이 "나가라",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나는 가방에 꽂고 반쯤 가려둔 무지개 손깃발을 꺼내 작게 환호했다.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그의 발언 덕분에 이 자리에 당당히 있을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슬펐다. 내가 향하는 광장엔 야유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내 자리는 여전히, 그래. 여전히.
12월 8일, 그날은 집회도 기자회견도 없었다. 12월 9일, 내국인 일자리 빼앗는 불법 외노자 추방하라는 발언이 나왔다. 사전에 배치된 발언이었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대응은 충분치 않았다. 머뭇거렸다. 내 자리는 언제나 대오 밖에서 서성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퀴어가 아니었으므로, 여성이 아니므로, 언제나 뒷정리를 담당하는 노조 지역본부 부설기관 소속이었으므로, 서성였다. 고민하다 무대 옆으로 향했다. 이미 다른 사람 몇몇이 발언에 대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난감해하는 듯했다. 손에 쥔 발언문을 바라보았다. 김제에서 산재로 돌아가신 강태완님 장례식에서 뭐라도 얘기할까 고민하며 써놓고 한쪽이 찢어질 때까지 읽었던 발언문이 쥐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꿰뚫렸다. 태완님의 죽음, 나의 삶―내 안의 비정상을 죽이고 또 죽이던 나날, 닿을 수 없던 무지개존, 죄책감처럼 달라붙은 질문, 그 어디서도 자격도 자리도 찾을 수 없는 자들,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숨이라도 쉬기 위해 덕지덕지 붙여둔, 이젠 내 몸 같은 트랜스플래그와 무지개의 기억. 꿰뚫려 나갔다.
발언을 요청했다. 역시 난감해했다. 괜찮았다. 프로그램 순서는 이미 숙지했다. 그 정도 여유는 요구할만했다. 짧게 하라는 응답을 받았다. 찢어져 가던 발언문 위에 줄을 긋고 다시 꿰뚫린 언어를 새겼다. 새겨진 언어를 몸 위에 얹었다. 주변에 새겨진 언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깃발처럼 세웠다. 언제나 그랬듯. 당신들이 찌른 말이 이곳에 있다. 불법이고 위험하므로 추방해야 하는 몸이 이곳에 있다.
트랜스젠더가 이곳에 있다. 지금, 여기, 전주에.
힘이 빠져 벽에 기댔다. 다른 몸이 내 몸을 붙잡았다. 김이 나는 커피를 받았다. 사진을 받았다. 발언 사진, 그리고 깃대만 보느라 다른 곳을 살피지 못하는 초보 기수처럼 나는 알지 못했던, 응원봉 대신 무지개를 띄운 패드를 날 향해 들어준 이의 사진. 감사를,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귤과 박카스와 인사를 받았다. 그 후 일주일 넘게 그랬다. 그러니 응답해야 했다. 이곳의 광장에 깃발을 세워두자. 자리를 찾지 못할 당신을 기다리자.
그리고 함께 머무르자. 지금, 여기, 전주에.
말하기의 힘
"여성 운동을 하면서, 힘을 얻기 위한 첫걸음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자신에게 이름 붙이기라는 것을 배웠다."
일주일.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내 몸 위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광장은 공간이다. 나는 전주 광장이라는 장소성 위에 12.3 비상계엄 이후라는 시간성을 교차시킨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덧붙인다. 주변은 중심과의 관계를 배제하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전북과 서울. 계엄 전의 시간과 탄핵 이후의 시간. 그 위에 나를 올려둔다.
나는 그 시공간을 교차하며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겨왔다. 전북에서만 살아온 나. 이곳을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나.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나. 결국 떠나지 못한 나. 연구하는 법을 배우고 운동하는 시공간을 통과했으되 자신을 연구자로도 활동가로도 여길 수 없던 나. 남자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괴롭고 불편한 일이더라도 그래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퀴어로 여길 수 없던 나. 생존이라는 일을 해내야 했던 나. 어떻게든 살아냈고, 내 퀴어함을 받아들였고, 더는 견딜 수 없어 규범적 공간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나. 자국이 남은, 실패와 환대가 한데 뒤섞인 시공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을 환대하는 장소로 변해가길 바라며 사람들과 연결되려 시도한 나. 그리고 그 모든 시공간을 삼켜버릴 듯했던 12월 3일의 계엄과, 이곳에 머무를 자격 없는 존재를 내쫓아야 한다는 자유발언에 내가 허락되지 않았던 앞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 공간에 당연함은 없다고 말하기 시작한 12월 9일의 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 몸이 있었다.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조각난 이들, 우리의 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 몸에서 다시 출발하자. 내 몸은 내 목소리가 나오는 장소다. 내 몸은 내가 생각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장소다. 내 몸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불안과 공포와 기쁨과 무심함과 고통과 안온함과 비참함과 유쾌함과 자긍심으로 새겨지는 장소다. 내 몸은 내가 살아가는 이곳과 관계를 맺는 장소다. 타인과 만나는 장소이며, 그 만남을 해석하는 장소다. 나의 몸은 결코 그것이 들어선 장소의 규칙에 맞물린 적 없는 장소였으며, 오랜 시간 남자로 살아남기 위해 증오해야만 하는 장소였으며, 그 자체로 머무를 수 있고 환대받을 수 있는 자리라 느끼지 못해 수없이 물어뜯고 찌르고 잘라내는 상상을, 때론 물리적 고통을 새겨야만 했던 장소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동안 끝없이 삐걱거렸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몸은 산산이 조각나 세상으로 흩어지고 바스러지고 흘러내렸다.
"삐걱거리고 있단 느낌"이 중요하다. 삐걱거리다, 크고 단단한 물건이 서로 닿아서 갈리는 소리가 자꾸 나다. 또는 그런 소리를 자꾸 내다. 정상성에서 이탈했다는 감각은 삐걱거림으로 드러난다. 정상성은 단단하다. 공간의 규칙 또한 단단하다. 적어도 그렇게 여겨지며, 세상을 단순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의 몸이 정상성의 공간에 "이곳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규칙을 반복적인 행동으로 새겨넣기 때문에 더 단단해진다. 내 삶의 맥락에서 직접 마주해야 했던 종류의 규범들, 이성애규범성, 성별이분법, 가부장제나 대도시중심성 따위도 단단했다. 그래서 내 몸이 그 규범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갈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갉혀나간다. 삐걱. 삐걱. 그 소리를 듣기 시작한 순간 나는 내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세상에, 이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규범이 나를 갉아내는 걸 용인했다.
'삐걱거림'은 '갉아냄'을 동반한다. 규범적 정상성은 우리의 신체를 규율한다. 공간의 규칙은 우리의 몸을 제약하고 실재하는 흔적을 남긴다. 만두의 지적처럼, 공포는 여성의 몸을 억누르는 감정이다. 공포를 느끼는 여성은 밤길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예민하게 소리를 들어야 하며, 자취방 앞에 남성의 것으로 보일 신발을 두고 문을 여닫을 때 몸을 수그려 비밀번호가 노출되지 않도록 가려야 한다. 그렇게 여성들은 몸을 갉아내 정상성 안으로 편입될 것을 요구받는다.
퀴어의 몸 또한, 정상성 안에서 삐걱대며 짓눌린다. 도시 오아시스로의 탈출 내러티브를 삶으로 끌어올 수 없는 지방 퀴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규범적 시간성에 따라, 수도권 대학에 진학해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고 집을 사고 결혼해서 정착하지 못한 지방의 청년들은 실패한 존재로 여겨진다. 지방-퀴어-청년은 더 복잡한 시간성을 통과해야 한다. 이 엿같이 보수적인 규범적 공간으로서의 지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 익명성과 퀴어 문화, 개방적인 커뮤니티 따위가 서울에 있다. 무엇보다, 그곳엔 시간이 멈춘 이곳과 달리 미래가 있다. 그러나 사실 서울은 한국의 규범성 자체다. 서울을 휘감은 시간성은 개인이 노력을 통해 능력주의적 정상성에 따라오길 요구한다. 숨 막힐 듯 빠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아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 경쟁한다. 그리고 서울로 떠난 지방민들은 많은 경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전북에 사는 퀴어-청년은 이곳에 정주하길 선택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전북의 장소성은 그런 것이다. 규범적 시간성을 이탈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 당연히 서울에 있어야 할 시간에 경쟁에서 탈락해 내려왔거나,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거나, 애초에 그 세계와 분리된 사람들이 사는 공간. 대도시는 이미 중심이므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서울은 "지방 아님"으로 구성된다. 마치 남성성이 "여자 아님"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중심은 주변을 배제함으로써 존재한다. 배제된 존재들은 자신을 조각내어 주변에 머무른다. 어디서도 정주하기 어렵다면 규범성을 이탈하는 내 일부를 깎아내고 적어도 '애매모호한' 위치에 남아야 한다. 지방에 남을 수밖에 없던 이들은 그러므로 정상성 안에 몸을 구겨 넣는다. 언어를 제한하고, 목소리를 지운다. 그것이 지방 퀴어의 생존이다. 머뭇거림, 할 수 없음, 무기력함, 어중간함. 전주 퀴어의 지역성이란 그런 것들이다. 그들은 조용히 머무르는 법, 잘려 나가는 법을 안다. 나의 어중간함을 생각한다. 모두와 단절되길 선택했던 나를 생각한다. "보통"의, "양호"한 모습이라 읽혔던 성전환증 진단서를 생각한다. 퀴어 친구도 커뮤니티도 찾지 못해 서울로 갔던 날들을 생각한다. 깃발을 부러워했던 날들, 그리고 깃발이 되어 만난 이들을 생각한다. 생각하며, 말한다. 멈추지 않고.
깃발이 바람이 되어
이곳에 머무른 깃발들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첫 커밍아웃 발언의 열기가 식고 머리가 차가워질 때쯤,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친 외로운 깃발들 덕에 광장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받았다. 난 그들과 서 있고 싶었다. 각자의 목소리를 휘감을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2025년 1월 10일부터 4월 10일까지 석 달, 전주 수요일 오픈마이크에 매번 나갔고 주변에서 맴돌던 퀴어들과 만났다. 탄핵 이후에도 우리는 오픈마이크를 이어가길 원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작은 세계를 잇는 자리가 되려 했다. 일터의 자원을 활용해 "광장 이후, 전주(전북) 퀴어들의 일과 삶 말하기 글방 연구"라는 작은 매듭을 지었다. 매듭 위에서 머뭇거리던 퀴어의 몸들이 춤을 췄다. 깃발처럼, 부는 바람에 서로를 때리고 엉키지만, 다시 펄럭이는 몸.
7주 동안 우리는 실패를 반복해 머뭇거리던 서로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방법을 연습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경험했다. 이곳에서 일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또는 의미 없는 것들의 떨림과 함께 떨었다. 그 돌봄은 산출물을 내기 위한 연구의 형식으로는 쉽지 않았다. 수요일 저녁마다 다과비로 밥 아닌 밥을 먹었다. 글방이 끝나던 밤 10시쯤엔 벌써 버스가 끊기기 시작하는 전주를, 차에 가득 타고 한 바퀴 돌았다. 퇴근 후 글방을 진행하고 다시 사무실에 갔다. 연구원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업무 사이, 그 틈새의 시간을 쪼개 움직여야 우리는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 시간이 가능했던 건 내 일부를 기꺼이 견뎌달라는 요청에 응답해준 나의 소중한 퀴어 친구들이 여기 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설렘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기다리는 내게 와준, 와줄 당신들. 취약한 날 드러내고 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던, 애매모호하지만 안전한 자리를 떠나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다가가 상처 입어 준 이들.
상처 입지 않는 관계는 없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돌봄은 없다. 삶이 교차하는 매듭은 지저분하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우린 완산구청으로, 선미촌과 시장바닥으로, 한옥마을과 새만금으로, 지저분한 매듭 위로 향했다. 글방 위를 흐르던 실이 맞닿은 공간들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우리가 그곳에 있다. 그곳에 자국을 남기면 누군가는 그 흔적을 보았고, 살았다. 그저 살았다. 그리고 그들과 이어진 나는 이곳에서 다시, 또다시 삶을 말한다. 지난 11월 광주퀴어문화축제 연대 발언에서 나는 요청했다.
"광퀴에 나오신 여러분. 어쩌면 무서워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고 아프고 이상한 것들과 멀어지려는 여러분. 저는 위험하고 아프고 이상한 제 몸으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을 기억해주세요.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다가가 상처 입어 주세요. 어디서도 우리가 될 수 없던 사람들, 불법과 괴물, 역겨움과 오염의 이름을 뒤집어쓴 사람들, 당연하게 여겨지는 삶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요. 그건 김기홍 가해고발인처럼 살아남아 싸우는 이들과 각자의 목소리와 해시태그로 연대하는 일이고, 미등록이주노동자의 죽음에 침묵하지 않는 일이고, 계엄 1년을 앞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배제에 서로의 삶으로 맞서는 일입니다. 안전하기만을 바랐다면 전 이곳에 서지 않았을 거예요. 숨기고 감추고 숨는 삶 속에서 홀로 죽어갔을지도 모르는 몸이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우린, 살아남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방에서 퀴어로 사는 게 너무나 답답해서 숨이 막힐 때, 서로의 숨구멍이 될 수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깃발의 일터는 광장인가? 광장은 그저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에 순간적으로 머무는 틈새, 사이공간(interspace)인가? 그러므로 깃발 선 자리, 쓸모를 증명할 자리는 틈새와 순간뿐인가? 어느 순간 중심으로 들어와 마음을 휘젓다가도, 모든 일이 끝나면 돌돌 말려 제자리에 놓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 했다. 깃발은 상징이자 선언이다. 깃발이 된 몸을 펼친다. 마치 지도 같다. 우그러진 곳과 아픈 곳, 빛나는 곳과 삼켜진 곳이 있다. 규칙을 모르는 지도는 읽기 어렵다. 다가간다. 들린다. 어느새 겹친다. 엉긴다. 엉겨든 우리는 이곳에서 몸으로 선언한다. 깃발의 삶이 길 위에서 겹칠 때, 우리의 가쁜 숨은 바람이 되어 살아남을 것이다. 그 위에 소리를 싣고 흐를 것이다. 당신이 내쉰 숨이 바람 위로 날아들길 기다리며.
우리가 맞닿은 매듭이 궁금한 이들을 위해, 몇 개의 흔적을 남긴다.
조용화
전주 퀴어들의 공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석사논문을 썼고, 연구참여자들에게 던진 "이곳에 나의 자리는 있는가?"란 질문이 사실 내게 필요했다는 걸 한참 헤맨 끝에야 깨달았다. 졸업 후 일하던 전북노동정책연구원에서 트랜스젠더퀴어로 정체화했고, 이제는 우리가 서로의 자리가 되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곳 퀴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본스타인, 케이트(2015), 『젠더 무법자: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 조은혜 옮김, 바다출판사.↩
클레어, 일라이(2020),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248쪽.↩
만두(2025), “패닉, 페미니즘: '여성의 공포'와 스펙터클의 정치”,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9.↩
Gray, Mary L.(2009), Out in the Country: Youth, Media and Queer Visibility in Rural Americ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4호(2026.3.) l 퀴어 공간과 지역
전북의 퀴어들이 살아내는 엉겨든 깃발의 시간
조용화
함께 머무르자. 지금, 여기, 전주에.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반 무렵, 샤워 도중 트위터를 보다 몸이 마를 때까지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12월 4일 새벽, 서울로, 국회로 올라가야 할지, 자료 따위를 옮겨야 할지, 숨어야 할지, 다른 이들처럼 고양이를 부탁하고 짐을 싸고 짝꿍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몸들이 전주 충경로사거리 앞에서 9시 긴급집회를 하기로 정했을 때, 그제야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는 정체화 이후 내 몸 위에 보호막처럼 달라붙어 있던 화장도 하지 못한 채 경찰 수십 명이 붙은 곳으로 걸었다. 12월 5일, 트위터를 통해 서울 소식을 분 단위로 확인했다. 전주에서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 시민들이 약간 붙은 규모의 집회를 이어가는 동안, 3일 밤 그리고 4일 새벽과 똑같은,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란 질문을 죄책감처럼 되새겼다.
12월 6일, 서울 광장을 향한 부러움에 몸서리쳤다. 화면 너머 그곳엔 무지개 깃발들이 넘실대는 무지개존이 있었다. 보이는 퀴어들과 평등수칙을 띄우는 전광판이 있었다. 환상 같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내겐 그게 절실했다. 환상이라도 붙잡아야 견딜 수 있을 테니. 12월 7일, 단체버스를 타고 처음 서울로 갔다. 여의도에는 사람이 파도처럼 흘렀다. 전북처럼 집회에 오는 사람들이 더 있는지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몸들이 넘실댔다. 무지개존을 찾았다. 사람들 너머에 있었다. 벽처럼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사람이 쏟아지고, 나는 건너갈 수 없는 무지개존을 바라볼 수 있는 섬 같은 화단 위에 자리 잡았다. 어떤 이가 커밍아웃하며, 더는 광장의 혐오가 여성과 소수자를 지워내지 못하도록 하자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수많은 페미니스트, 소수자 단체들의 깃발이 보인다며 깃발을 흔들어달라고 했다. 동시에 옆에서 어떤 이들이 "나가라",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나는 가방에 꽂고 반쯤 가려둔 무지개 손깃발을 꺼내 작게 환호했다.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그의 발언 덕분에 이 자리에 당당히 있을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슬펐다. 내가 향하는 광장엔 야유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내 자리는 여전히, 그래. 여전히.
12월 8일, 그날은 집회도 기자회견도 없었다. 12월 9일, 내국인 일자리 빼앗는 불법 외노자 추방하라는 발언이 나왔다. 사전에 배치된 발언이었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대응은 충분치 않았다. 머뭇거렸다. 내 자리는 언제나 대오 밖에서 서성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퀴어가 아니었으므로, 여성이 아니므로, 언제나 뒷정리를 담당하는 노조 지역본부 부설기관 소속이었으므로, 서성였다. 고민하다 무대 옆으로 향했다. 이미 다른 사람 몇몇이 발언에 대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난감해하는 듯했다. 손에 쥔 발언문을 바라보았다. 김제에서 산재로 돌아가신 강태완님 장례식에서 뭐라도 얘기할까 고민하며 써놓고 한쪽이 찢어질 때까지 읽었던 발언문이 쥐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꿰뚫렸다. 태완님의 죽음, 나의 삶―내 안의 비정상을 죽이고 또 죽이던 나날, 닿을 수 없던 무지개존, 죄책감처럼 달라붙은 질문, 그 어디서도 자격도 자리도 찾을 수 없는 자들,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숨이라도 쉬기 위해 덕지덕지 붙여둔, 이젠 내 몸 같은 트랜스플래그와 무지개의 기억. 꿰뚫려 나갔다.
발언을 요청했다. 역시 난감해했다. 괜찮았다. 프로그램 순서는 이미 숙지했다. 그 정도 여유는 요구할만했다. 짧게 하라는 응답을 받았다. 찢어져 가던 발언문 위에 줄을 긋고 다시 꿰뚫린 언어를 새겼다. 새겨진 언어를 몸 위에 얹었다. 주변에 새겨진 언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깃발처럼 세웠다. 언제나 그랬듯. 당신들이 찌른 말이 이곳에 있다. 불법이고 위험하므로 추방해야 하는 몸이 이곳에 있다.
트랜스젠더가 이곳에 있다. 지금, 여기, 전주에.
힘이 빠져 벽에 기댔다. 다른 몸이 내 몸을 붙잡았다. 김이 나는 커피를 받았다. 사진을 받았다. 발언 사진, 그리고 깃대만 보느라 다른 곳을 살피지 못하는 초보 기수처럼 나는 알지 못했던, 응원봉 대신 무지개를 띄운 패드를 날 향해 들어준 이의 사진. 감사를,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귤과 박카스와 인사를 받았다. 그 후 일주일 넘게 그랬다. 그러니 응답해야 했다. 이곳의 광장에 깃발을 세워두자. 자리를 찾지 못할 당신을 기다리자.
그리고 함께 머무르자. 지금, 여기, 전주에.
말하기의 힘
일주일.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내 몸 위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광장은 공간이다. 나는 전주 광장이라는 장소성 위에 12.3 비상계엄 이후라는 시간성을 교차시킨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덧붙인다. 주변은 중심과의 관계를 배제하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전북과 서울. 계엄 전의 시간과 탄핵 이후의 시간. 그 위에 나를 올려둔다.
나는 그 시공간을 교차하며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겨왔다. 전북에서만 살아온 나. 이곳을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나.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나. 결국 떠나지 못한 나. 연구하는 법을 배우고 운동하는 시공간을 통과했으되 자신을 연구자로도 활동가로도 여길 수 없던 나. 남자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괴롭고 불편한 일이더라도 그래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퀴어로 여길 수 없던 나. 생존이라는 일을 해내야 했던 나. 어떻게든 살아냈고, 내 퀴어함을 받아들였고, 더는 견딜 수 없어 규범적 공간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나. 자국이 남은, 실패와 환대가 한데 뒤섞인 시공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을 환대하는 장소로 변해가길 바라며 사람들과 연결되려 시도한 나. 그리고 그 모든 시공간을 삼켜버릴 듯했던 12월 3일의 계엄과, 이곳에 머무를 자격 없는 존재를 내쫓아야 한다는 자유발언에 내가 허락되지 않았던 앞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 공간에 당연함은 없다고 말하기 시작한 12월 9일의 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 몸이 있었다.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조각난 이들, 우리의 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러니 내 몸에서 다시 출발하자. 내 몸은 내 목소리가 나오는 장소다. 내 몸은 내가 생각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장소다. 내 몸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불안과 공포와 기쁨과 무심함과 고통과 안온함과 비참함과 유쾌함과 자긍심으로 새겨지는 장소다. 내 몸은 내가 살아가는 이곳과 관계를 맺는 장소다. 타인과 만나는 장소이며, 그 만남을 해석하는 장소다. 나의 몸은 결코 그것이 들어선 장소의 규칙에 맞물린 적 없는 장소였으며, 오랜 시간 남자로 살아남기 위해 증오해야만 하는 장소였으며, 그 자체로 머무를 수 있고 환대받을 수 있는 자리라 느끼지 못해 수없이 물어뜯고 찌르고 잘라내는 상상을, 때론 물리적 고통을 새겨야만 했던 장소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동안 끝없이 삐걱거렸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몸은 산산이 조각나 세상으로 흩어지고 바스러지고 흘러내렸다.
"삐걱거리고 있단 느낌"이 중요하다. 삐걱거리다, 크고 단단한 물건이 서로 닿아서 갈리는 소리가 자꾸 나다. 또는 그런 소리를 자꾸 내다. 정상성에서 이탈했다는 감각은 삐걱거림으로 드러난다. 정상성은 단단하다. 공간의 규칙 또한 단단하다. 적어도 그렇게 여겨지며, 세상을 단순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의 몸이 정상성의 공간에 "이곳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규칙을 반복적인 행동으로 새겨넣기 때문에 더 단단해진다. 내 삶의 맥락에서 직접 마주해야 했던 종류의 규범들, 이성애규범성, 성별이분법, 가부장제나 대도시중심성 따위도 단단했다. 그래서 내 몸이 그 규범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갈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갉혀나간다. 삐걱. 삐걱. 그 소리를 듣기 시작한 순간 나는 내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세상에, 이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규범이 나를 갉아내는 걸 용인했다.
'삐걱거림'은 '갉아냄'을 동반한다. 규범적 정상성은 우리의 신체를 규율한다. 공간의 규칙은 우리의 몸을 제약하고 실재하는 흔적을 남긴다. 만두의 지적처럼3, 공포는 여성의 몸을 억누르는 감정이다. 공포를 느끼는 여성은 밤길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예민하게 소리를 들어야 하며, 자취방 앞에 남성의 것으로 보일 신발을 두고 문을 여닫을 때 몸을 수그려 비밀번호가 노출되지 않도록 가려야 한다. 그렇게 여성들은 몸을 갉아내 정상성 안으로 편입될 것을 요구받는다.
퀴어의 몸 또한, 정상성 안에서 삐걱대며 짓눌린다. 도시 오아시스로의 탈출 내러티브4를 삶으로 끌어올 수 없는 지방 퀴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규범적 시간성에 따라, 수도권 대학에 진학해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고 집을 사고 결혼해서 정착하지 못한 지방의 청년들은 실패한 존재로 여겨진다. 지방-퀴어-청년은 더 복잡한 시간성을 통과해야 한다. 이 엿같이 보수적인 규범적 공간으로서의 지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 익명성과 퀴어 문화, 개방적인 커뮤니티 따위가 서울에 있다. 무엇보다, 그곳엔 시간이 멈춘 이곳과 달리 미래가 있다. 그러나 사실 서울은 한국의 규범성 자체다. 서울을 휘감은 시간성은 개인이 노력을 통해 능력주의적 정상성에 따라오길 요구한다. 숨 막힐 듯 빠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아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 경쟁한다. 그리고 서울로 떠난 지방민들은 많은 경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전북에 사는 퀴어-청년은 이곳에 정주하길 선택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전북의 장소성은 그런 것이다. 규범적 시간성을 이탈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 당연히 서울에 있어야 할 시간에 경쟁에서 탈락해 내려왔거나,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거나, 애초에 그 세계와 분리된 사람들이 사는 공간. 대도시는 이미 중심이므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서울은 "지방 아님"으로 구성된다. 마치 남성성이 "여자 아님"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중심은 주변을 배제함으로써 존재한다. 배제된 존재들은 자신을 조각내어 주변에 머무른다. 어디서도 정주하기 어렵다면 규범성을 이탈하는 내 일부를 깎아내고 적어도 '애매모호한' 위치에 남아야 한다. 지방에 남을 수밖에 없던 이들은 그러므로 정상성 안에 몸을 구겨 넣는다. 언어를 제한하고, 목소리를 지운다. 그것이 지방 퀴어의 생존이다. 머뭇거림, 할 수 없음, 무기력함, 어중간함. 전주 퀴어의 지역성이란 그런 것들이다. 그들은 조용히 머무르는 법, 잘려 나가는 법을 안다. 나의 어중간함을 생각한다. 모두와 단절되길 선택했던 나를 생각한다. "보통"의, "양호"한 모습이라 읽혔던 성전환증 진단서를 생각한다. 퀴어 친구도 커뮤니티도 찾지 못해 서울로 갔던 날들을 생각한다. 깃발을 부러워했던 날들, 그리고 깃발이 되어 만난 이들을 생각한다. 생각하며, 말한다. 멈추지 않고.
깃발이 바람이 되어
이곳에 머무른 깃발들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첫 커밍아웃 발언의 열기가 식고 머리가 차가워질 때쯤,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친 외로운 깃발들 덕에 광장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받았다. 난 그들과 서 있고 싶었다. 각자의 목소리를 휘감을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2025년 1월 10일부터 4월 10일까지 석 달, 전주 수요일 오픈마이크에 매번 나갔고 주변에서 맴돌던 퀴어들과 만났다. 탄핵 이후에도 우리는 오픈마이크를 이어가길 원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작은 세계를 잇는 자리가 되려 했다. 일터의 자원을 활용해 "광장 이후, 전주(전북) 퀴어들의 일과 삶 말하기 글방 연구"라는 작은 매듭을 지었다. 매듭 위에서 머뭇거리던 퀴어의 몸들이 춤을 췄다. 깃발처럼, 부는 바람에 서로를 때리고 엉키지만, 다시 펄럭이는 몸.
7주 동안 우리는 실패를 반복해 머뭇거리던 서로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방법을 연습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경험했다. 이곳에서 일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또는 의미 없는 것들의 떨림과 함께 떨었다. 그 돌봄은 산출물을 내기 위한 연구의 형식으로는 쉽지 않았다. 수요일 저녁마다 다과비로 밥 아닌 밥을 먹었다. 글방이 끝나던 밤 10시쯤엔 벌써 버스가 끊기기 시작하는 전주를, 차에 가득 타고 한 바퀴 돌았다. 퇴근 후 글방을 진행하고 다시 사무실에 갔다. 연구원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업무 사이, 그 틈새의 시간을 쪼개 움직여야 우리는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 시간이 가능했던 건 내 일부를 기꺼이 견뎌달라는 요청에 응답해준 나의 소중한 퀴어 친구들이 여기 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설렘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기다리는 내게 와준, 와줄 당신들. 취약한 날 드러내고 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던, 애매모호하지만 안전한 자리를 떠나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다가가 상처 입어 준 이들.
상처 입지 않는 관계는 없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돌봄은 없다. 삶이 교차하는 매듭은 지저분하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우린 완산구청으로, 선미촌과 시장바닥으로, 한옥마을과 새만금으로, 지저분한 매듭 위로 향했다. 글방 위를 흐르던 실이 맞닿은 공간들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우리가 그곳에 있다. 그곳에 자국을 남기면 누군가는 그 흔적을 보았고, 살았다. 그저 살았다. 그리고 그들과 이어진 나는 이곳에서 다시, 또다시 삶을 말한다. 지난 11월 광주퀴어문화축제 연대 발언에서 나는 요청했다.
"광퀴에 나오신 여러분. 어쩌면 무서워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고 아프고 이상한 것들과 멀어지려는 여러분. 저는 위험하고 아프고 이상한 제 몸으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을 기억해주세요.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다가가 상처 입어 주세요. 어디서도 우리가 될 수 없던 사람들, 불법과 괴물, 역겨움과 오염의 이름을 뒤집어쓴 사람들, 당연하게 여겨지는 삶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요. 그건 김기홍 가해고발인처럼 살아남아 싸우는 이들과 각자의 목소리와 해시태그로 연대하는 일이고, 미등록이주노동자의 죽음에 침묵하지 않는 일이고, 계엄 1년을 앞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배제에 서로의 삶으로 맞서는 일입니다. 안전하기만을 바랐다면 전 이곳에 서지 않았을 거예요. 숨기고 감추고 숨는 삶 속에서 홀로 죽어갔을지도 모르는 몸이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우린, 살아남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방에서 퀴어로 사는 게 너무나 답답해서 숨이 막힐 때, 서로의 숨구멍이 될 수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깃발의 일터는 광장인가? 광장은 그저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에 순간적으로 머무는 틈새, 사이공간(interspace)인가? 그러므로 깃발 선 자리, 쓸모를 증명할 자리는 틈새와 순간뿐인가? 어느 순간 중심으로 들어와 마음을 휘젓다가도, 모든 일이 끝나면 돌돌 말려 제자리에 놓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 했다. 깃발은 상징이자 선언이다. 깃발이 된 몸을 펼친다. 마치 지도 같다. 우그러진 곳과 아픈 곳, 빛나는 곳과 삼켜진 곳이 있다. 규칙을 모르는 지도는 읽기 어렵다. 다가간다. 들린다. 어느새 겹친다. 엉긴다. 엉겨든 우리는 이곳에서 몸으로 선언한다. 깃발의 삶이 길 위에서 겹칠 때, 우리의 가쁜 숨은 바람이 되어 살아남을 것이다. 그 위에 소리를 싣고 흐를 것이다. 당신이 내쉰 숨이 바람 위로 날아들길 기다리며.
우리가 맞닿은 매듭이 궁금한 이들을 위해, 몇 개의 흔적을 남긴다.
조용화
전주 퀴어들의 공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석사논문을 썼고, 연구참여자들에게 던진 "이곳에 나의 자리는 있는가?"란 질문이 사실 내게 필요했다는 걸 한참 헤맨 끝에야 깨달았다. 졸업 후 일하던 전북노동정책연구원에서 트랜스젠더퀴어로 정체화했고, 이제는 우리가 서로의 자리가 되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곳 퀴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본스타인, 케이트(2015), 『젠더 무법자: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 조은혜 옮김, 바다출판사.↩
클레어, 일라이(2020),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248쪽.↩
만두(2025), “패닉, 페미니즘: '여성의 공포'와 스펙터클의 정치”,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9.↩
Gray, Mary L.(2009), Out in the Country: Youth, Media and Queer Visibility in Rural Americ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