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26.3)]기획의 변: 퀴어 공간과 지역

 4호(2026.3.)  l  퀴어 공간과 지역

기획의 변: 퀴어 공간과 지역

양준호



얼마 전에 친구들과 문경새재에 방문했다가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한 길이 문화재로 남아있을 정도로 서울 중심주의의 역사가 질기고 유구하다는 농담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날에도 서울 중심주의의 위력은 건재하다. 퀴어로 살려면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조언할 정도로 서울 집중 현상은 한국에서의 성적 삶을 설명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수도권 대학으로의 진학,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 생활, 데이팅 어플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홍대와 이태원과 종로라는 퀴어 공간, 여러 퀴어 모임과 행사, 공연이나 영화, 심지어는 시위나 행진에 참여하는 것까지. 서울에 산다는 것은 단지 정주하는 위치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들에 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퀴어로서의 삶과 도시라는 배경을 연결하는 관습은 퀴어 선배의 조언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 말하자면 퀴어와 도시 사이의 관계는 연구 담론 안에서 나름의 지적 전통을 갖기도 한다.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등장한 초기 형태의 게이 및 레즈비언 연구는 ‘동성애자’ 정체성의 사회적 구성과 그 구성의 물질적 조건을 연구하면서 퀴어 현상을 기본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근대적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1 도시는 익명성과 임금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유, 비친족적 사회관계망과 목욕탕, 공원 등의 인프라 그리고 바, 클럽 등 소비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상업문화 및 밤 문화를 제공함으로써 비이성애적 삶을 집단적으로 누릴 수 있게 했다. 이후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퀴어 하위문화 공동체와 삶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2 오랜 시간 동안 도시는 퀴어 연구의 중심적인 배경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퀴어 연구가 도시를 퀴어 삶의 전제 조건으로 가정하는 암묵적인 경향은 이후 여러 연구자에 의해 도전받아 왔다. 퀴어 연구의 이런 침묵을 “대도시규범성”(metronormativity)이라는 개념으로 짚어내면서 일군의 연구자들은 퀴어 문화와 미디어가 도시적 퀴어 삶을 정상적이고 도달해야 하는 이상으로 표상하고, 도시 외 지역에서의 퀴어 경험을 후진적이거나 덜 발전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규범성을 논의의 중심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3 단순히 ‘시골에도 퀴어가 산다’는 주장을 넘어서, 대도시규범성을 비판하는 연구들은 퀴어 연구를 지배하는 도시 중심적 서사가 도시로 이주해서 공동체적 하위문화를 꾸리며 살 수 있는 특정 젠더, 계급, 인종적 조건을 특권화함으로써 퀴어 삶의 의미를 협소하게 만든다고 꼬집는다.

 

이번 호의 주제인 “퀴어 공간과 지역”은 상기한 연구사적 문제 제기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서울 중심적인 대도시규범성을 문제 삼고 서울 바깥 지역의 퀴어 공간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역동과 함께, 관계성을 통해 새롭게 창출되는 가능성과 재구성되는 장소성은 무엇인지 고찰하는 글들을 모았다.

신경준의 글 「서로를 퀴어링하는 지역성과 성소수자」는 자신의 논문 “섬-소수자의 연결된 삶 만들기: 제주시 게이 술집의 사례를 통하여”(2025)의 연구를 계획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과 들었던 생각을 반추하면서 성소수자들이 제주라는 섬에서 퀴어로서의 삶을 꾸려 나가는 면모를 어떻게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흔적들을 펼쳐 보여준다. 단순히 ‘서울 대 지방’이라는 대립 구도를 반복해서 재생산하지 않고, 마치 하나로 특정할 수 있는 ‘지역적 삶의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굴지 않으면서 어떻게 ‘퀴어함의 지역적 형태들’에 접근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파편적으로 읽기’라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경준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지역성이라는 것조차 하나의 총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모인 복합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조용화의 글 「전북의 퀴어들이 살아내는 엉겨든 깃발의 시간」은 2024년 12월 3일 이후 이어진 윤석열 탄핵 국면 속에서 전주의 퀴어로 살며 분투했던 기록을 써 내려간다. 이성애규범성에 의해 ‘비정상’으로 낙인찍히는 퀴어의 삶과, 온갖 경계들이 교차하는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몸과, 경쟁에서 탈락한 실패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지방이라는 공간이 포개어진다. 전북의 탄핵 광장에서 커밍아웃하고 매주 수요일 마이크 앞에 섰던 경험, 그 이후 퀴어 글방을 운영한 경험, 광주퀴어문화축제 연대 발언을 한 경험이 이어지면서 전북의 퀴어들이 서로 만나고 연결되고 이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모리의 글 「지역 퀴어 운동은 어디로 갔는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퀴어문화협동조합 홍예당’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성소수자 운동이 마주하는 구조적 어려움은 무엇이고, 그런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지역 성소수자 운동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인용하자면, “자기 긍정과 상호 돌봄의 공동체, 퀴어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 안전망, 학습된 무기력을 깨고 삶의 잠재성을 탐색할 수 있는 시작점. 그 모든 것으로서의 퀴어 운동이 지역에도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리적 단위로 나뉘는 공간들만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이나 화장실과 같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해 논의하는 글들도 실렸다. 조예음은 「안전공간(safe space)의 어지러운 경계」에서 자신의 석사학위논문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레즈비언 트위터(현 X) 사용자들이 SNS를 안전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벌이는 실천들이 어떤 정치적 긴장과 협상을 동반하게 되는지 탐사한다. 안전공간은 단지 평화로운 공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안전’으로 여겨지는 상태를 방해할 수 있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걸러내고, 제한하고, 추방하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유지되는 곳이다. 그 과정에서 순수성과 동질성이 강화되고, 차이를 견디고 수용할 가능성은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서 차단된다. 이에, 조예음은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동원되는 문법은 무엇이고, 안전공간에 속할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이며 그 결과로 구성되는 안전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서영은 「경계의 공간, 화장실」에서 자신의 석사학위논문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트랜스젠더의 성별 분리 화장실 이용을 둘러싼 안전 담론에 개입한다. 공간을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신, 역사 속에서 권력을 통해 구성되는 관계적인 것으로 접근하면서 서영은 성별 분리 화장실의 역사를 돌아보고 폭력으로부터의 안전에 대한 요구에 ‘성별 분리’로 답해 온 구조적 문제를 짚는다. 성폭력의 문제를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단순화하고 안전의 문제를 성별 분리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회피하면서 피해와 그에 대한 예방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한편, 화장실 성별 분리의 역사를 식민주의적 문명화 담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영의 글은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이용을 둘러싼 안전 담론이 기대고 있는 역사적 토양이 무엇인지 확장해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신진연구자 코너에서는 서로 다른 학제에서 성소수자/퀴어 연구를 수행한 세 연구자를 소개한다. 위치기반 게이 데이팅 어플 사용 경험이 어떻게 공간에 대한 감각을 변화시키고 서울규범성을 강화하는지 탐구한 김정민의 연구는 이번 호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에서 퀴어 연구를 시도한 경험을 중심으로 뻣뻣한 학계를 퀴어로 오염시키는 짜릿함을 전한다. 박은지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 그리고 TERF 담론의 영향 아래서 ‘레즈비언’이 점차 특정한 의미를 얻게 될 때, 그 이름으로는 자신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느끼는 ‘여성애자 여성’들의 내러티브를 분석한 소회를 들려준다. 전상현은 행정학과에서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성을 연구한 경험을 통해 퀴어 연구가 특정 학제에서만 연구할 수 있는 주제로 이해되는 경향이 무엇이 논의 가능한 주제인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행정학 영역에서 비판적 연구가 이어져야 함을 피력한다.


  1. D’Emilio, John(1983), “Capitalism and Gay Identity”, in Ann Snitow, Christine Stansell and Sharon Thompson(eds.), Powers of Desire: The Politics of Sexuality,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pp. 100-114. 또한 다음을 참고. Rubin, Gayle(1984), “Thinking Sex: Notes for a Radical Theory of the Politics of Sexuality”, in Carol S. Vance(ed.), Pleasure and Danger: Exploring Female Sexuality, Boston: Routledge & Kegan Paul, pp. 267-319.

  2. 대표적으로 Chauncey, George(1994), Gay New York: Gender, Urban Culture, and the Making of the Gay Male World, 1890-1940, New York: BasicBooks.

  3. Halberstam, Judith(2005), In a Queer Time and Place: Transgender Bodies, Subcultural Lives,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이와 더불어, Herring, Scott(2010), Another Country: Queer Anti-Urbanism,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