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l 신진연구
‘생물학적 성별’과 ‘물질적 몸’ 사이에서
「‘목소리가 되다’ -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과 끝없는 감응의 과정」 (2025)
윤성진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석사 과정 동안 전공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란해하곤 했다. 학부 전공이었던 물리학은 어려운 학문이라는 인식은 있어도, 그 개념 자체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하면 매번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보통은 ‘과학사가 과학의 역사, 과학철학이 과학에 관한 철학이라면 과학기술학은 과학의 사회학 정도에 해당한다.’라고 설명하고 넘기곤 했다. 실제로 과학기술학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세부 연구 주제는 많고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포괄해 설명하기란 지금도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경우, 석사 과정 동안 과학기술학이 나에게 가장 크게 인상을 남긴 특성은 ‘몸을 보는 관점’이다.
과학기술학이 보는 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의 기존 인식과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는 몸의 범위가 인간이나 생물, 유기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무생물, 인공물, 기계와 기구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은 페미니즘 이론에서만큼이나 과학기술학에서 핵심적인 텍스트로 읽힌다. 이 글에서 해러웨이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비인간 동물, 동물/기계, 물질/비물질 사이의 경계가 이미 무너졌다는 점을 지적하며, 몸을 어느 한 범주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 ‘사이보그’로 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과학기술학의 대표적 이론으로 꼽히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 또한 인간이 아닌 비인간도 네트워크 속 능동적 행위자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처럼 과학기술학은 ‘기술과 얽힌 몸’을 보기를 촉구하며, 우리의 몸이 이미 과학기술과 불가분함을 보여주는 분야이다.
순수하게 자연적인 몸은 없고, 우리 모두 이미 인공과 기술 속에 얽혀 있다는 관점은 트랜스 권리를 말하기에도 유용해 보인다. 특히나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본래 자연의 이분법적 성별 관념이 있으며, 이에 대한 이탈이 잘못되었거나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응하기 좋아 보인다. ‘과학기술학’의 이름으로 ‘본래 자연’이라는 것은 없으며, 당신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성별도 의학에서 만들어지고 진단된 것이며, 그런 의학과 몸에 대한 지식, 과학기술이 어차피 모두 구성된 것이니 트랜스젠더라고 다를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석사 과정 재학 도중, 학과 저널에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 과학기술학으로 트랜스젠더 말하기」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두 번째 측면은 과학기술학이 ‘물질적 몸’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연구 흐름에서 두드러지는 관점이다.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대표적인 신유물론 연구자로 꼽히는 캐런 바라드(Karen Barad)는 ‘언어’와 ‘담론’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흐름을 비판하며, ‘물질(matter)’에 관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가 지적한 바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관해 페미니즘·퀴어 이론가인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물질성과 생물학을 다룬 페미니즘 연구를 간과하는 부당한 비판이라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신유물론을 포함한 과학기술학과 페미니즘을 다루는 연구에서 이전의 젠더 연구와 페미니즘 이론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며, 나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몸’을 강조하는 신유물론의 관점 또한 트랜스젠더와 트랜지션을 말하기에 유용한 측면이 있다. 가령, 바라드가 그리는 ‘물질적 몸’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생물학적 성별’ 개념처럼 고정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물질적 존재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없기 때문에 물질적 몸의 경계 자체도 불안정하다고 말한다. 바라드가 ‘물질적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담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성과 담론이 끊임없이 얽히는 현장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기술학에서 논의되는 ‘물질적 몸’ 개념은 몸을 이야기하면서도 ‘생물학적 성별’에 환원되지 않는, 더 확장적인 의미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의 석사 논문 제목인 ‘목소리가 되다’는 라투르의 논문 「몸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How to Talk About the Body?)」에서 사용된 개념인 ‘코가 되다’를 차용한 것이다. 라투르는 몸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안하기 위해 향수 산업의 코 훈련을 사례로 든다. 조향사들은 향 키트를 통해 점차 세밀한 향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이 훈련은 ‘코가 되는’ 과정이라고 일컬어진다. ‘코가 되는’ 일은 몸이 독립적으로 달성하는 변화가 아니라, 향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향에 감응(affect)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에 따라 ‘몸을 가진다’라는 것은 ‘감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몸’의 변화가 관계 속에서, 훈련을 통해, 그리고 ‘감응’을 배움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관념은 트랜지션에 관한 논의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생물학적 성별’이 변할 수 없거나, 수술과 같은 의료적 개입을 통해서만 변화할 수 있다는 관점을 뒤집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질적 몸’에 관한 과학기술학의 확장적인 논의를 통해 트랜지션이 수술이나 HRT와 같은 의료적 개입만이 아니라, 관계와 소통, 감응과 훈련도 ‘물질적 몸’에 변화를 일으키는 트랜지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을 중심 소재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목소리의 변화가 HRT의 결과로 동반되는 트랜스 남성과 달리, 트랜스 여성의 HRT는 목소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적 목소리’를 얻기 위해 트랜스 여성들은 성대 수술을 받거나, 훈련을 통해 목소리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수술’과 ‘훈련’의 두 방식은 배타적이지 않다. 수술을 통해 성대의 길이를 줄인다고 해도 새로운 성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며, 이때 발성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사실상 만족할 만한 목소리 변화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 참여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술은 여성적 목소리를 내는 훈련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줄 뿐, 핵심적인 변화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은 몸을 자르고 붙이는 외부의 개입보다는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바꾸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이 이해하는 몸 개념에서는 이러한 변화도 ‘물질적 몸’의 변화이다. 또한 몸을 다르게 사용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수많은 행위자와 감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목소리 훈련에는 수술과 의사, 음성치료사 등도 개입할 수 있지만, 녹음기와 스펙트로그램, 목소리의 높이를 측정하는 앱과 같은 비인간들도 참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소리를 듣는 청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가 목소리를 듣는지에 따라 어떤 목소리가 ‘여성적 목소리’로 판단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가 ‘여성적 목소리’인가? 최소한 단일한 정답이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의학 연구에서도,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에 관한 인터넷 담론에서도, 연구 참여자들 사이에서도 ‘여성적 목소리’의 기준이 무엇이 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 참여자들은 다만 주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가 소통하는 성별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향할 방향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적 목소리’는 일정한 기준과 조건을 충족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에 의해 여성적이라고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목소리 트랜지션은 소통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모든 청자에게 받아들여지는 일관적인 답이 없기 때문에 ‘완료’되거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나는 석사 논문에서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이 ‘끝나지 않는 감응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의료/수술에 한정되지 않고 ‘완트’와 같은 완료나 도착의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는 방식으로 트랜지션을 새롭게 읽어보고자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남는다면, 과학기술학이 트랜지션을 말하기에 유용하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물질적 몸’을 강조하는 일은 감각 할 수 있는 몸을 조작하는 과정으로 논의를 좁히게 하는 영향을 미치는데, 분명히 트랜지션은 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 트랜지션에 정답이 없다면, 결국 이들이 향하고 있는 목소리의 ‘여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가 있기는 한가? 의미가 있다면, 정말 정해진 답이나 도착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의미가 없다면, 이 모든 과정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나는 결국 답을 내지 못했고, 이는 ‘물질적 몸’이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점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연구가 트랜지션, 특히나 물질적 몸을 변형하는 일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듯하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성대 수술이나 의료 업계의 부정적인 측면, 특히 후유증이나 추후 관리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이나 결국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의료 현장의 모습을 조명하지 못한 채 성대 수술을 ‘몸을 다르게 사용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동원할 만한 수단 정도로 그리지는 않았는지 우려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외과 수술과 유전자 조작의 힘으로 인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로 오용되는 경향이 있다. 의료적 트랜지션 또한 의료 업계의 자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측면을 간과한 채 긍정하기만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기에 나는 당분간 트랜지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과학기술학은 트랜스젠더/퀴어/여성의 몸을 이해하는 데 독특하고도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이 영역이 더 탐색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학기술학에서 퀴어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지고, 퀴어 연구에서 과학기술학이 적절히 참고되었으면 하며, 두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그 접점을 들여다보기를 촉구하며 글을 마친다.
윤성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에서 과학기술학(STS)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있다.
Haraway, Donna(1985), “A Manifesto for Cyborgs: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1980s”, Socialist Review, 15(2): 65–108.↩
Latour, B(2005),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윤성진(2024),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 과학기술학으로 트랜스젠더 말하기”, 『사이: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저널』, (2): 8-25,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4일).↩
Barad, Karen(2003),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28(3): 801–31.↩
Ahmed, Sara(2008), “Open Forum Imaginary Prohibitions: Some Preliminary Remarks on the Founding Gestures of the `New Materialism’”, European Journal of Women’s Studies, 15(1): 23-39.↩
Barad, Karen(2007),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Quantum Physics and the Entanglement of Matter and Meaning. Duke University Press.↩
‘Affect’는 대체로 ‘정동’으로 번역되지만, 해당 석사 논문에서는 과학기술학에서 사용되는 번역어인 ‘감응’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번역은 다음 논문에서 참고해 볼 수 있다. 임소연(2019), 「과학기술과 여성 연구하기: 신유물론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학의 안-사이에서 ‘몸과 함께’」, 『과학기술학연구』, 19(3): 169-202.↩
Latour, Bruno(2004), “How to Talk About the Body? The Normative Dimension of Science Studies”, Body & Society, 10(2-3): 205-229.↩
소리의 파형을 분석하는 장치이다.↩
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l 신진연구
‘생물학적 성별’과 ‘물질적 몸’ 사이에서
「‘목소리가 되다’ -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과 끝없는 감응의 과정」 (2025)
윤성진
신진연구 코너에서는 최근 출간된 성소수자/퀴어 관련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석사 과정 동안 전공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란해하곤 했다. 학부 전공이었던 물리학은 어려운 학문이라는 인식은 있어도, 그 개념 자체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하면 매번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보통은 ‘과학사가 과학의 역사, 과학철학이 과학에 관한 철학이라면 과학기술학은 과학의 사회학 정도에 해당한다.’라고 설명하고 넘기곤 했다. 실제로 과학기술학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세부 연구 주제는 많고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포괄해 설명하기란 지금도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경우, 석사 과정 동안 과학기술학이 나에게 가장 크게 인상을 남긴 특성은 ‘몸을 보는 관점’이다.
과학기술학이 보는 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의 기존 인식과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는 몸의 범위가 인간이나 생물, 유기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무생물, 인공물, 기계와 기구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은 페미니즘 이론에서만큼이나 과학기술학에서 핵심적인 텍스트로 읽힌다. 이 글에서 해러웨이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비인간 동물, 동물/기계, 물질/비물질 사이의 경계가 이미 무너졌다는 점을 지적하며, 몸을 어느 한 범주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 ‘사이보그’로 보는 방식을 제안한다.1 과학기술학의 대표적 이론으로 꼽히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 또한 인간이 아닌 비인간도 네트워크 속 능동적 행위자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이다.2 이처럼 과학기술학은 ‘기술과 얽힌 몸’을 보기를 촉구하며, 우리의 몸이 이미 과학기술과 불가분함을 보여주는 분야이다.
순수하게 자연적인 몸은 없고, 우리 모두 이미 인공과 기술 속에 얽혀 있다는 관점은 트랜스 권리를 말하기에도 유용해 보인다. 특히나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본래 자연의 이분법적 성별 관념이 있으며, 이에 대한 이탈이 잘못되었거나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응하기 좋아 보인다. ‘과학기술학’의 이름으로 ‘본래 자연’이라는 것은 없으며, 당신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성별도 의학에서 만들어지고 진단된 것이며, 그런 의학과 몸에 대한 지식, 과학기술이 어차피 모두 구성된 것이니 트랜스젠더라고 다를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석사 과정 재학 도중, 학과 저널에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 과학기술학으로 트랜스젠더 말하기」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3
두 번째 측면은 과학기술학이 ‘물질적 몸’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연구 흐름에서 두드러지는 관점이다.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대표적인 신유물론 연구자로 꼽히는 캐런 바라드(Karen Barad)는 ‘언어’와 ‘담론’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흐름을 비판하며, ‘물질(matter)’에 관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가 지적한 바가 있다.4 이러한 입장에 관해 페미니즘·퀴어 이론가인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물질성과 생물학을 다룬 페미니즘 연구를 간과하는 부당한 비판이라고 지적하였다.5 실제로 신유물론을 포함한 과학기술학과 페미니즘을 다루는 연구에서 이전의 젠더 연구와 페미니즘 이론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며, 나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몸’을 강조하는 신유물론의 관점 또한 트랜스젠더와 트랜지션을 말하기에 유용한 측면이 있다. 가령, 바라드가 그리는 ‘물질적 몸’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생물학적 성별’ 개념처럼 고정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물질적 존재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없기 때문에 물질적 몸의 경계 자체도 불안정하다고 말한다.6 바라드가 ‘물질적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담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성과 담론이 끊임없이 얽히는 현장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기술학에서 논의되는 ‘물질적 몸’ 개념은 몸을 이야기하면서도 ‘생물학적 성별’에 환원되지 않는, 더 확장적인 의미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의 석사 논문 제목인 ‘목소리가 되다’는 라투르의 논문 「몸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How to Talk About the Body?)」에서 사용된 개념인 ‘코가 되다’를 차용한 것이다. 라투르는 몸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안하기 위해 향수 산업의 코 훈련을 사례로 든다. 조향사들은 향 키트를 통해 점차 세밀한 향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이 훈련은 ‘코가 되는’ 과정이라고 일컬어진다. ‘코가 되는’ 일은 몸이 독립적으로 달성하는 변화가 아니라, 향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향에 감응(affect)7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에 따라 ‘몸을 가진다’라는 것은 ‘감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8
‘물질적 몸’의 변화가 관계 속에서, 훈련을 통해, 그리고 ‘감응’을 배움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관념은 트랜지션에 관한 논의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생물학적 성별’이 변할 수 없거나, 수술과 같은 의료적 개입을 통해서만 변화할 수 있다는 관점을 뒤집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질적 몸’에 관한 과학기술학의 확장적인 논의를 통해 트랜지션이 수술이나 HRT와 같은 의료적 개입만이 아니라, 관계와 소통, 감응과 훈련도 ‘물질적 몸’에 변화를 일으키는 트랜지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을 중심 소재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목소리의 변화가 HRT의 결과로 동반되는 트랜스 남성과 달리, 트랜스 여성의 HRT는 목소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적 목소리’를 얻기 위해 트랜스 여성들은 성대 수술을 받거나, 훈련을 통해 목소리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수술’과 ‘훈련’의 두 방식은 배타적이지 않다. 수술을 통해 성대의 길이를 줄인다고 해도 새로운 성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며, 이때 발성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사실상 만족할 만한 목소리 변화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 참여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술은 여성적 목소리를 내는 훈련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줄 뿐, 핵심적인 변화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은 몸을 자르고 붙이는 외부의 개입보다는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바꾸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이 이해하는 몸 개념에서는 이러한 변화도 ‘물질적 몸’의 변화이다. 또한 몸을 다르게 사용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수많은 행위자와 감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목소리 훈련에는 수술과 의사, 음성치료사 등도 개입할 수 있지만, 녹음기와 스펙트로그램9, 목소리의 높이를 측정하는 앱과 같은 비인간들도 참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소리를 듣는 청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가 목소리를 듣는지에 따라 어떤 목소리가 ‘여성적 목소리’로 판단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가 ‘여성적 목소리’인가? 최소한 단일한 정답이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의학 연구에서도,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에 관한 인터넷 담론에서도, 연구 참여자들 사이에서도 ‘여성적 목소리’의 기준이 무엇이 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 참여자들은 다만 주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가 소통하는 성별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향할 방향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적 목소리’는 일정한 기준과 조건을 충족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에 의해 여성적이라고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목소리 트랜지션은 소통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모든 청자에게 받아들여지는 일관적인 답이 없기 때문에 ‘완료’되거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나는 석사 논문에서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 트랜지션이 ‘끝나지 않는 감응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의료/수술에 한정되지 않고 ‘완트’와 같은 완료나 도착의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는 방식으로 트랜지션을 새롭게 읽어보고자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남는다면, 과학기술학이 트랜지션을 말하기에 유용하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물질적 몸’을 강조하는 일은 감각 할 수 있는 몸을 조작하는 과정으로 논의를 좁히게 하는 영향을 미치는데, 분명히 트랜지션은 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 트랜지션에 정답이 없다면, 결국 이들이 향하고 있는 목소리의 ‘여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가 있기는 한가? 의미가 있다면, 정말 정해진 답이나 도착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의미가 없다면, 이 모든 과정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나는 결국 답을 내지 못했고, 이는 ‘물질적 몸’이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점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연구가 트랜지션, 특히나 물질적 몸을 변형하는 일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듯하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성대 수술이나 의료 업계의 부정적인 측면, 특히 후유증이나 추후 관리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이나 결국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의료 현장의 모습을 조명하지 못한 채 성대 수술을 ‘몸을 다르게 사용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동원할 만한 수단 정도로 그리지는 않았는지 우려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외과 수술과 유전자 조작의 힘으로 인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로 오용되는 경향이 있다. 의료적 트랜지션 또한 의료 업계의 자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측면을 간과한 채 긍정하기만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기에 나는 당분간 트랜지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과학기술학은 트랜스젠더/퀴어/여성의 몸을 이해하는 데 독특하고도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이 영역이 더 탐색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학기술학에서 퀴어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지고, 퀴어 연구에서 과학기술학이 적절히 참고되었으면 하며, 두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그 접점을 들여다보기를 촉구하며 글을 마친다.
윤성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에서 과학기술학(STS)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있다.
Haraway, Donna(1985), “A Manifesto for Cyborgs: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1980s”, Socialist Review, 15(2): 65–108.↩
Latour, B(2005),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윤성진(2024),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 과학기술학으로 트랜스젠더 말하기”, 『사이: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저널』, (2): 8-25,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4일).↩
Barad, Karen(2003),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28(3): 801–31.↩
Ahmed, Sara(2008), “Open Forum Imaginary Prohibitions: Some Preliminary Remarks on the Founding Gestures of the `New Materialism’”, European Journal of Women’s Studies, 15(1): 23-39.↩
Barad, Karen(2007),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Quantum Physics and the Entanglement of Matter and Meaning. Duke University Press.↩
‘Affect’는 대체로 ‘정동’으로 번역되지만, 해당 석사 논문에서는 과학기술학에서 사용되는 번역어인 ‘감응’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번역은 다음 논문에서 참고해 볼 수 있다. 임소연(2019), 「과학기술과 여성 연구하기: 신유물론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학의 안-사이에서 ‘몸과 함께’」, 『과학기술학연구』, 19(3): 169-202.↩
Latour, Bruno(2004), “How to Talk About the Body? The Normative Dimension of Science Studies”, Body & Society, 10(2-3): 205-229.↩
소리의 파형을 분석하는 장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