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우리의 도착
나의 동료들과 도착하지 않는 항해들
황아림
“당신의 손에 지도가 한 장 쥐어져 있다. 여기에 당신의 출발지가 될 한 장소가 있다. 도착을 상상하기 위해 출발을 상상한다. 당신은 지도를 따라간다. 현관문을 찾을 수 없어 뒷문을 통해 진입한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움푹 파이고 불쑥 솟아오른 공간 사이에서 당신은 길을 잃을 뻔한다. 간신히 들어온 이곳에는 긴 복도를 따라 밀실들이 줄지어 숨어 있다. 문들은 반쯤 열려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안에 있던 어떤 기억들이 튀어나와 당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집의 맨 안쪽에 도착한 당신은 방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기 직전이다. 당신은 본능적인 촉으로 알 수 있다. 닫힌 문 뒤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장 사적이고 내밀하며 안락한 장소로부터의 탈주 혹은 이탈. 문을 열기로 결심한 당신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당신이 태어난 순간이다. 당신은 제2의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환영을 보면 죽는다는 이 세계의 법칙 때문에, 곧이어 집이 뒤흔들리고 천장과 바닥과 벽이 무너진다. 집 안 곳곳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잔해들이 떠내려간다. 밀려든 물이 당신을 덮친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차오른다. 당신은 휘청거리며 정신을 잃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신은···. 파괴된 폐허 속에서 눈을 뜬다. 이 망망대해에서 당신은 철저히 혼자다. 하지만 당신은 안다. 혼자일 수 없다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나온 모든 기억과 관계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무너진 채로. 소중한 과거의 잔해들로 기념비를 세우는 대신 당신은 무덤을 만든다. 그것을 현재의 다른 세계를 향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당신 또한 그 잔해들이 되기로 한다. 그리고 당신은, 함께할 동료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2021년에 결성된 창작그룹 우프(W/O F.)의 전시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다. 앞으로 약 한 달 뒤면 이 길고 길었던 여정에도 마침표가 찍힌다. 일곱 명의 우프 멤버들을 대표해서 적기에는 우리 모두 각자의 말도 많고 탈도 많으므로, 전시의 중간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인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전시에 대한 소개도, 지나간 현장들에 대한 리뷰도 아니다. 전시의 과정에서 남겨두고 싶은 몇 가지 감상과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년, 내가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를 기억한다. 유달리 길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난겨울. 우프의 멤버이자 나의 전 애인 지영에게서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시기에 나는 여러 관계들의 지각변동 속에서 상처를 입고 이 퀴어 공동체에서 완전히 사라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바랐던 것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는 일이었다. 상처 구멍에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를 먹여서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더 잘 아물게 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찢어 벌린 상처들에 대해서도. 내가 상처 입은 만큼 내가 준 상처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말하고 싶다.’ 이 욕망이 입안 가득 맴돌고 있었다. 나는 전시를 통해 그 말들을 꺼내놓고자 했다. 이 퀴어한 관계들 속에서, 지겹도록 익숙하게 절여진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고자 했다. 떠나고 싶었지만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아는 이 공동체를, 나는 돌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돌보는 것을 온몸으로 원하기로 했다. 그들이 떠나면 죽어버릴 만큼 외로울 것을 알았다. 우프의 노션 회의록을 확인해 보니 그동안 우프가 대략 80번의 미팅과 회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지부진하고 지난하며 실체를 알 수 없는 씨름의 시간들, 선명한 논쟁의 장면들에서 우리가 참 많은 대화와 수다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의 수다스러움, 귀여움, 징그러움, 절망과 분노와 기쁨으로 차오른 얼굴들에 대한 것. 여기에 다 적을 수도 없고 적히지도 않을 것들에 대한 것이다. 이 전시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얼굴들. 방문들. 27명의 참여 작가와 협력진들. 모였다 흩어지는 관객들. 이 전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같이 길을 걷고 있어서 안심이 되는, 떠나도 후련할, 없어선 안 될 나의 동료들.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아트선재센터 앞에 완성하던 날, 전시의 서문이 인쇄되어 물질적인 몸이 되어 돌아왔을 때를 기억한다. 전날 밤 인쇄를 하고 접착 시트로 열처리를 하느라 밤을 새웠던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선재 앞에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착하니 새하얀 이동식 가벽 앞에 우프의 재윤과 지영, 선미와 서정이 모여있었다. 우리는 가벽에 서문을 부착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 뒤 아트선재 건너편 편의점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가 되자 전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편의점 2층을 방문했고, 예인과 보람도 만났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었다. 선재의 눈을 피해 잠시 머무는 은밀한 아지트 같기도 했다. 무언가 막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가벽 앞을 방문했고 전시 서문을 읽고 지나갔다. 아트선재의 전시 오프닝이 시작되자, 가벽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프의 분신과도 같은 흰 몸. 우리는 그 몸을 통해 말을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몸을 통과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영구적이고 항시적인 몸이 아닌, 임시로 지어진 말과 몸을 통해서. ‘나의 동료들에게’라는, 수신인을 전제한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편지를 보냈다. 동료 작가들에게. 그 앞을 지나갈 우리의 퀴어들에게. 쓰레기통의 쓰레기들에게. 성노동자들에게. 아프고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떠나간 많은 이들과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우프의 전시 서문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관객들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아주 먼 미래에나 만나게 될 관객과 독자들에게. 대화를 청하면서. 함께 공모할 것을 제안하면서.
“자, 이제 출발한다!”
“그런데 어디로···?”
다급하게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지도에서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한다. 출발지만 있고 도착지는 없다는 것. 그래서 길을 만들면서, 지도를 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지. 불확실한 임무만을 떠안은 채 우리는 배에 올랐다. 우리의 도착지. ‘또 다른 세계’에 연루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채로. 이 배에 함께 탄 27명의 동료는 완전히 제각각이었다. 각자는 저마다의 쪼(調)와 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항로는 그들의 요구와 개입에 따라 계속 형태를 바꾸었다.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물. 이 전시를 생각하면 파도와 물거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던 동료 디자이너 동인이의 말처럼, 우리의 항로는 몸집을 불리는 파도 같았고, 솟구쳤다가 무너지는 물결처럼 결코 한눈에 잡히지 않았다. 그 사이 나에게도 작고 큰 변화들이 생겼다. 올해 초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오키나와에서는 약 2천 명 규모의 미군 부대가 중동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4월에 방문한 사천 용당 마을은 특수산업단지(항공우주군사시설)가 되어 있었고, 마을 입구가 있던 자리는 막혀 있었다. 그곳에는 ‘촬영 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2019년부터 기록해 왔던 용당 마을과 나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들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무렵 우프는 또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팔레스타인문화연대의 활동가들을 통해 퐁피두센터 한화 보이콧 캠페인 소식을 접했다. 개관일에 맞춰 여러 활동 단체와 예술 단체들이 연대 성명과 기자회견 〈철회하라, 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프가 그 일에 연루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사진가는, 기록자는, 바로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준비 과정에서 나는 사천 용당 마을을 인수해 갈아엎은 KAI와 이스라엘 군수 기업 엘빗시스템즈가 무인 항공기 개발 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연결들이 발생했다. 내가 붙들고 있던 문제들은 어느새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우프는 또 다른 동료 DummyDumpyImage를 호출해 〈불의에 저항하여 촬영하는 자들〉이라는 게릴라 연대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6월 4일 아침, 퐁피두센터 한화 앞에 수많은 단체와 개인 연대자들이 모였다. 발언문과 시가 낭독되었고 다이인(Die-in)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사람들의 카메라는 깃발과 피켓,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향했다.
‘너희의 무기가 사람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기록을 무기로 삼는다. 기록으로서 저항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 데서나 먹고, 자고, 모든 정착을 거부한 채 이동 중이다. 당신은 몸을 집으로 삼는다. 늙고 병들고 사라질 몸. 누군가를 끌어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몸. 당신은 몸과 몸이 맞닿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다. 함께 탑승한 이 배에서 우리는 서로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애인이 된다. 서로를 실망시키고 상처 입히고, 또 그 상처를 돌볼 것이다.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끝내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떠날 것이다. 거부할 것이다. 당신의 유한한 몸은 살아있는 동안 수없이 많은 장소를 방문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알고 있던 세계는 여러 번 무너질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떠나고, 익숙했던 자리가 사라지고,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장소들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갈아엎어질 것이다. 당신 또한 이전의 당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무너진 자리에서 무한한 연결들이 생겨난다. 당신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되고, 나의 상실이 다른 상실들과 연결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에 연루된다. 도착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대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믿는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들, 같은 분노와 슬픔을 지나온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을 믿는다.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와 수다, 웃음과 눈물, 실패와 실수들을 믿는다. 거부해야지만 보이는 것이 있다. 도착하지 않아야만,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의 도착’은 동료들. 서로를 향해 몸 기울이는 순간 잠시 열리는 틈. 틈을 벌려 이동한다. 서로를 발견하기 위해. 서로에게 발견되기 위해. 사라짐에 저항하면서도 언젠가 사라질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신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사람들을 만난다. 동료가 된다.
황아림
디자인을 하고 글을 쓴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말과 이미지를 수집하고 시각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창작그룹 W/O F.에서 활동 중이다. 전시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를 공동으로 기획했다.
우프(W/O F.) 기획전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는 2026년 3월 20일부터 6월 28일까지 진행된 전시다. 곽예인, 김보람, 리타, 문상훈, 민동인, 보영, 성재윤, 세나미요, 손서정, 양승욱, 여름, 연혜원, 이심지, 남선미, 이반지하, 진송, 최현숙, 콜렉티브 야식과 낮잠, 한솔, 허호정, 호영, 홍지영, 황선미, 한초원, 99p, 황아림이 참여했다. iamwritingtoyou, 2026.03.20,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18일) ↩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는 우프가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다. 2026년 3월 19일부터 20일까지 아트선재센터 앞에 설치되었다. 살기 위해 죽는 우리는, 살기 위해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우리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편지와 함께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 전시 시작을 알린다.
iamwritingtoyou, 2026.03.20., “First letter to my comrades”. (최종검색일2026년 6월 18일) ↩한화에 대항하는 국제행동주간: 6.4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보이콧 기자회견 〈철회하라, 한화!〉 는 2026년 6월 4일 한화의 이스라엘 무기산업 협력과 ‘아트워싱’을 비판하며,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에 반대하는 국제 연대 행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2026.06.01., “한화에 대항하는 국제행동주간 : 6.4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보이콧 기자회견 <철회하라, 한화!>”.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18일) ↩〈불의에 저항하여 촬영하는 자들〉은 창작그룹 우프(W/O F.)가 2023년 1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행동에 연대하며 시작한 기록 실천의 이름이다. 사진가와 창작자가 사회적·정치적 현장에 참여해 기록을 통해 연대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었으며, 이후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비정기적으로 이어졌다.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에서는 6.4 서울 행동 〈철회하라, 한화〉에 연계하여 현장을 공동 촬영·기록하는 게릴라 연대체로 구성되었다. 참여자들은 집단학살 위에 세워진 퐁피두센터 한화의 오프닝, 6.4 서울 행동의 기자회견, 액팅, 피켓과 현수막, 연대자들의 얼굴과 몸짓 등 현장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을 자유롭게 촬영했다. 촬영된 이미지는 참여자들의 활동명과 함께 우프의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웹사이트와 DummyDumpyImage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2026.06.01.,“6.4(목) 불의에 저항하여 촬영하는 자들 모집 (W/O F. × DummyDumpyImage 주관)”.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18일) ↩
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우리의 도착
나의 동료들과 도착하지 않는 항해들
황아림
“당신의 손에 지도가 한 장 쥐어져 있다. 여기에 당신의 출발지가 될 한 장소가 있다. 도착을 상상하기 위해 출발을 상상한다. 당신은 지도를 따라간다. 현관문을 찾을 수 없어 뒷문을 통해 진입한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움푹 파이고 불쑥 솟아오른 공간 사이에서 당신은 길을 잃을 뻔한다. 간신히 들어온 이곳에는 긴 복도를 따라 밀실들이 줄지어 숨어 있다. 문들은 반쯤 열려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안에 있던 어떤 기억들이 튀어나와 당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집의 맨 안쪽에 도착한 당신은 방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기 직전이다. 당신은 본능적인 촉으로 알 수 있다. 닫힌 문 뒤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장 사적이고 내밀하며 안락한 장소로부터의 탈주 혹은 이탈. 문을 열기로 결심한 당신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당신이 태어난 순간이다. 당신은 제2의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환영을 보면 죽는다는 이 세계의 법칙 때문에, 곧이어 집이 뒤흔들리고 천장과 바닥과 벽이 무너진다. 집 안 곳곳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잔해들이 떠내려간다. 밀려든 물이 당신을 덮친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차오른다. 당신은 휘청거리며 정신을 잃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신은···. 파괴된 폐허 속에서 눈을 뜬다. 이 망망대해에서 당신은 철저히 혼자다. 하지만 당신은 안다. 혼자일 수 없다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나온 모든 기억과 관계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무너진 채로. 소중한 과거의 잔해들로 기념비를 세우는 대신 당신은 무덤을 만든다. 그것을 현재의 다른 세계를 향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당신 또한 그 잔해들이 되기로 한다. 그리고 당신은, 함께할 동료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2021년에 결성된 창작그룹 우프(W/O F.)의 전시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1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다. 앞으로 약 한 달 뒤면 이 길고 길었던 여정에도 마침표가 찍힌다. 일곱 명의 우프 멤버들을 대표해서 적기에는 우리 모두 각자의 말도 많고 탈도 많으므로, 전시의 중간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인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전시에 대한 소개도, 지나간 현장들에 대한 리뷰도 아니다. 전시의 과정에서 남겨두고 싶은 몇 가지 감상과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년, 내가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를 기억한다. 유달리 길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난겨울. 우프의 멤버이자 나의 전 애인 지영에게서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시기에 나는 여러 관계들의 지각변동 속에서 상처를 입고 이 퀴어 공동체에서 완전히 사라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바랐던 것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는 일이었다. 상처 구멍에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를 먹여서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더 잘 아물게 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찢어 벌린 상처들에 대해서도. 내가 상처 입은 만큼 내가 준 상처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말하고 싶다.’ 이 욕망이 입안 가득 맴돌고 있었다. 나는 전시를 통해 그 말들을 꺼내놓고자 했다. 이 퀴어한 관계들 속에서, 지겹도록 익숙하게 절여진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고자 했다. 떠나고 싶었지만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아는 이 공동체를, 나는 돌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돌보는 것을 온몸으로 원하기로 했다. 그들이 떠나면 죽어버릴 만큼 외로울 것을 알았다. 우프의 노션 회의록을 확인해 보니 그동안 우프가 대략 80번의 미팅과 회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지부진하고 지난하며 실체를 알 수 없는 씨름의 시간들, 선명한 논쟁의 장면들에서 우리가 참 많은 대화와 수다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의 수다스러움, 귀여움, 징그러움, 절망과 분노와 기쁨으로 차오른 얼굴들에 대한 것. 여기에 다 적을 수도 없고 적히지도 않을 것들에 대한 것이다. 이 전시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얼굴들. 방문들. 27명의 참여 작가와 협력진들. 모였다 흩어지는 관객들. 이 전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같이 길을 걷고 있어서 안심이 되는, 떠나도 후련할, 없어선 안 될 나의 동료들.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2를 아트선재센터 앞에 완성하던 날, 전시의 서문이 인쇄되어 물질적인 몸이 되어 돌아왔을 때를 기억한다. 전날 밤 인쇄를 하고 접착 시트로 열처리를 하느라 밤을 새웠던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선재 앞에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착하니 새하얀 이동식 가벽 앞에 우프의 재윤과 지영, 선미와 서정이 모여있었다. 우리는 가벽에 서문을 부착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 뒤 아트선재 건너편 편의점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가 되자 전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편의점 2층을 방문했고, 예인과 보람도 만났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었다. 선재의 눈을 피해 잠시 머무는 은밀한 아지트 같기도 했다. 무언가 막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가벽 앞을 방문했고 전시 서문을 읽고 지나갔다. 아트선재의 전시 오프닝이 시작되자, 가벽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프의 분신과도 같은 흰 몸. 우리는 그 몸을 통해 말을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몸을 통과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영구적이고 항시적인 몸이 아닌, 임시로 지어진 말과 몸을 통해서. ‘나의 동료들에게’라는, 수신인을 전제한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편지를 보냈다. 동료 작가들에게. 그 앞을 지나갈 우리의 퀴어들에게. 쓰레기통의 쓰레기들에게. 성노동자들에게. 아프고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떠나간 많은 이들과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우프의 전시 서문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관객들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아주 먼 미래에나 만나게 될 관객과 독자들에게. 대화를 청하면서. 함께 공모할 것을 제안하면서.
“자, 이제 출발한다!”
“그런데 어디로···?”
다급하게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지도에서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한다. 출발지만 있고 도착지는 없다는 것. 그래서 길을 만들면서, 지도를 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지. 불확실한 임무만을 떠안은 채 우리는 배에 올랐다. 우리의 도착지. ‘또 다른 세계’에 연루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채로. 이 배에 함께 탄 27명의 동료는 완전히 제각각이었다. 각자는 저마다의 쪼(調)와 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항로는 그들의 요구와 개입에 따라 계속 형태를 바꾸었다.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물. 이 전시를 생각하면 파도와 물거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던 동료 디자이너 동인이의 말처럼, 우리의 항로는 몸집을 불리는 파도 같았고, 솟구쳤다가 무너지는 물결처럼 결코 한눈에 잡히지 않았다. 그 사이 나에게도 작고 큰 변화들이 생겼다. 올해 초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오키나와에서는 약 2천 명 규모의 미군 부대가 중동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4월에 방문한 사천 용당 마을은 특수산업단지(항공우주군사시설)가 되어 있었고, 마을 입구가 있던 자리는 막혀 있었다. 그곳에는 ‘촬영 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2019년부터 기록해 왔던 용당 마을과 나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들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무렵 우프는 또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팔레스타인문화연대의 활동가들을 통해 퐁피두센터 한화 보이콧 캠페인 소식을 접했다. 개관일에 맞춰 여러 활동 단체와 예술 단체들이 연대 성명과 기자회견 〈철회하라, 한화〉3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프가 그 일에 연루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사진가는, 기록자는, 바로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준비 과정에서 나는 사천 용당 마을을 인수해 갈아엎은 KAI와 이스라엘 군수 기업 엘빗시스템즈가 무인 항공기 개발 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연결들이 발생했다. 내가 붙들고 있던 문제들은 어느새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우프는 또 다른 동료 DummyDumpyImage를 호출해 〈불의에 저항하여 촬영하는 자들〉4이라는 게릴라 연대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6월 4일 아침, 퐁피두센터 한화 앞에 수많은 단체와 개인 연대자들이 모였다. 발언문과 시가 낭독되었고 다이인(Die-in)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사람들의 카메라는 깃발과 피켓,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향했다.
‘너희의 무기가 사람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기록을 무기로 삼는다. 기록으로서 저항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 데서나 먹고, 자고, 모든 정착을 거부한 채 이동 중이다. 당신은 몸을 집으로 삼는다. 늙고 병들고 사라질 몸. 누군가를 끌어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몸. 당신은 몸과 몸이 맞닿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다. 함께 탑승한 이 배에서 우리는 서로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애인이 된다. 서로를 실망시키고 상처 입히고, 또 그 상처를 돌볼 것이다.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끝내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떠날 것이다. 거부할 것이다. 당신의 유한한 몸은 살아있는 동안 수없이 많은 장소를 방문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알고 있던 세계는 여러 번 무너질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떠나고, 익숙했던 자리가 사라지고,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장소들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갈아엎어질 것이다. 당신 또한 이전의 당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무너진 자리에서 무한한 연결들이 생겨난다. 당신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되고, 나의 상실이 다른 상실들과 연결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에 연루된다. 도착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대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믿는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들, 같은 분노와 슬픔을 지나온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을 믿는다.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와 수다, 웃음과 눈물, 실패와 실수들을 믿는다. 거부해야지만 보이는 것이 있다. 도착하지 않아야만,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의 도착’은 동료들. 서로를 향해 몸 기울이는 순간 잠시 열리는 틈. 틈을 벌려 이동한다. 서로를 발견하기 위해. 서로에게 발견되기 위해. 사라짐에 저항하면서도 언젠가 사라질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신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사람들을 만난다. 동료가 된다.
황아림
디자인을 하고 글을 쓴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말과 이미지를 수집하고 시각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창작그룹 W/O F.에서 활동 중이다. 전시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를 공동으로 기획했다.
우프(W/O F.) 기획전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는 2026년 3월 20일부터 6월 28일까지 진행된 전시다. 곽예인, 김보람, 리타, 문상훈, 민동인, 보영, 성재윤, 세나미요, 손서정, 양승욱, 여름, 연혜원, 이심지, 남선미, 이반지하, 진송, 최현숙, 콜렉티브 야식과 낮잠, 한솔, 허호정, 호영, 홍지영, 황선미, 한초원, 99p, 황아림이 참여했다. iamwritingtoyou, 2026.03.20,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18일) ↩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는 우프가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다. 2026년 3월 19일부터 20일까지 아트선재센터 앞에 설치되었다. 살기 위해 죽는 우리는, 살기 위해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우리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편지와 함께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 전시 시작을 알린다.
iamwritingtoyou, 2026.03.20., “First letter to my comrades”. (최종검색일2026년 6월 18일) ↩한화에 대항하는 국제행동주간: 6.4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보이콧 기자회견 〈철회하라, 한화!〉 는 2026년 6월 4일 한화의 이스라엘 무기산업 협력과 ‘아트워싱’을 비판하며,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에 반대하는 국제 연대 행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2026.06.01., “한화에 대항하는 국제행동주간 : 6.4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보이콧 기자회견 <철회하라, 한화!>”.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18일) ↩〈불의에 저항하여 촬영하는 자들〉은 창작그룹 우프(W/O F.)가 2023년 1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행동에 연대하며 시작한 기록 실천의 이름이다. 사진가와 창작자가 사회적·정치적 현장에 참여해 기록을 통해 연대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었으며, 이후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비정기적으로 이어졌다.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에서는 6.4 서울 행동 〈철회하라, 한화〉에 연계하여 현장을 공동 촬영·기록하는 게릴라 연대체로 구성되었다. 참여자들은 집단학살 위에 세워진 퐁피두센터 한화의 오프닝, 6.4 서울 행동의 기자회견, 액팅, 피켓과 현수막, 연대자들의 얼굴과 몸짓 등 현장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을 자유롭게 촬영했다. 촬영된 이미지는 참여자들의 활동명과 함께 우프의 《나의 동료들에게: I am writing to you》웹사이트와 DummyDumpyImage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2026.06.01.,“6.4(목) 불의에 저항하여 촬영하는 자들 모집 (W/O F. × DummyDumpyImage 주관)”.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