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하얀 벽의 붕괴와 돌봄의 연장선
김한민선
1.
미술관의 글에서 '나'를 지우는 데 익숙하다. 전시 서문, 보도자료, 리플렛에 실리는 작품 설명, 도슨트 프로그램을 위한 원고, 부대 행사를 홍보하는 문구 등. 소속 기관의 성격에 맞게, 개인의 경험보다 우선되는 논리에 맞추어 글을 쓴다. 학예팀의 막내 인턴부터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단 오늘까지 기관의 여러 글을 쓰면서 관객과 기관을 매개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남았고, 글 속의 '나'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관 밖에서, 퀴어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전시에서는 유독 '나'를 등장시키고 싶어 한다. 갑자기 자아가 비대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의 삶을 서두에 세우고, 낯부끄러운 고백을 기꺼워하며, 서간문으로 서문을 대체하고, 친밀한 관계를 구구절절 서술한다. 삶에 가까운 예술이 거칠어지는 것처럼, '나'가 등장하는 글은 정돈이 덜 되고, 매끄럽지 않다. 경험을 앞세워 논리가 불분명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삶과 닮아 거칠어진다는 건, 또 축축하고 끈적이는 경험의 촉감에 걸려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는 건, 매끄러운 면보다 굴곡이 많은 융털처럼 접촉면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나'들이 기대하는 효과는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기대는 이론들 역시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공적 경험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2003)의 시작을 반려견 카옌 페퍼와의 키스, 침의 교환이라는 친밀한 관계의 장면으로 열었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1999)은 저자가 자신의 뇌병변 장애인이자, 시골 백인 노동자 계급이며 트랜스젠더 퀴어로서 겪은 경험을 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글에서 자신의 삶은 이론 이전의 사례가 아니라 이론을 생산하는 조건이 되었다. ‘공적=객관적, 사적=주관적’이라는 틀 안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온 퀴어의 경험을 공론장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 이 글을 읽는 퀴어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방법론이듯, 퀴어 예술가가 자신의 삶을 끌고 들어오는 순간은 '당사자성', '진정성'을 위한 고백이 아니라 공적 언어의 부족을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또한 '나'의 거친 글들은, 우리의 삶이 하얀 종이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퀴어 미술의 시작이 하얀 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등장한 퀴어 미술을 주제로 나눈 대담, 한국 퀴어 미술에 대한 경험을 나누어 준 리타와 남웅의 노고가 담긴 고마운 책 『퀴어 미술 대담—동시대 한국 퀴어 미술의 현장』(2024)에도 묘사되는 것처럼, 한국의 퀴어 예술가들은 클럽과 모텔, 인터넷 커뮤니티, 재개발 예정 지역의 신생공간, 퀴어문화축제, 임시로 빌린 공간들 등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퀴어 미술 생태계는 기성 미술계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됐다. SNS는 전시와 이벤트를 홍보하는 수단을 넘어 서로를 발견하는 플랫폼이 되었고, 퀴어 예술 생산자들의 네트워크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확장했다.
2022년 ICOM(국제박물관협의회)은 50년 만에 박물관 정의를 대폭 개정한다.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영구 기관이다. 박물관은 대중에게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하며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윤리적이고 전문적으로 운영·소통하며 공동체의 참여를 바탕으로 교육·향유·성찰·지식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A museum is a not-for-profit, permanent institution in the service of society that researches, collects, conserves, interprets and exhibits tangible and intangible heritage. Open to the public, accessible and inclusive, museums foster diversity and sustainability. They operate and communicate ethically, professionally and with the participation of communities, offering varied experiences for education, enjoyment, reflection and knowledge sharing.)
포용성·접근성·지속 가능성·윤리를 전면에 내세운 새 정의는, 달리 읽으면 그간 미술관이 그 어느 것도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제도가 공식적으로 '포용'을 선언하는 순간, 그 선언이 실질적 변화를 추동하는지 아니면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언어로 기능하는지 물어야 한다. 2018년은 그 물음이 제기되기 전, 현장의 분위기가 바뀌던 해였다. 박그림, 전나환, 이정식, 오인환, 듀킴, 양승욱 등의 개인전이 개최되었고, 정은영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8》을 수상했다. 커밍아웃한 성소수자/퀴어 예술가들이 하얀 벽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다만, 신생공간과 독립 프로젝트가 활발해지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퀴어 커뮤니티가 서로를 발견하는 일이 쉬워진 시대와 맞물려 진행된 일이다. 이 시점에서 퀴어 예술가는 미술관을, 화이트 큐브를 필요로 하는가. 미술관이 대안적인 모델, 상징, 패러다임을 생성하기 위해 퀴어를 하나의 전략으로 삼고, 때로는 기관의 진보성을 과시하는 장치로 소비하며, 퀴어를 순화하고 은유하는 공간을 경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화이트 큐브는 해체와 비판 그리고 재건을 반복해 오고 있다. 매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 미술이 화이트 큐브로부터 해방을 말하지만, 예술의 자기반성 능력 강화, 역사적 맥락과 매체적 특수성을 사유하는 틀, 가치 기준이 시장에 포획되지 않도록 비평적 기준을 세우는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 화이트 큐브는 권력의 공간이 아닌,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와 맞물려 퀴어 예술가와 퀴어 미술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와 공간을 어떻게 차용하고 변형시킬 수 있나, 혹은 퀴어 미술은 그 공간 안에서 어떻게 번안할 수 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2.
2026년 3월 선프라이드 재단(Sunpride Foundation)의 《스펙트로신테시스(Spectrosynthesis)》가 한국 서울에서 개최됐다.
선프라이드 재단은 홍콩 출신 사업가 패트릭 선(Patrick Sun)이 2014년 예술을 통해 LGBTQ+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보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미션 아래 설립한 재단이며,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미술 컬렉터로 활동해 온 패트릭 선은 아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퀴어 예술과 역사를 공공 기관에서 전시하는 장기 프로젝트인 《스펙트로신테시스》를 진행하고 있다. 타이베이 현대미술관(MOCA)과 공동 주최한 첫 번째 전시는 아시아 공공 미술관에서 최초로 열린 LGBTQ+ 주제 전시였으며, 이번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시리즈의 네 번째 전시를 개최했다. 빛의 스펙트럼이 무지개를 이루듯, 다양한 정체성과 예술이 합성(synthesis)되어 새로운 가시성(visibility)을 만든다는 의미의 "스펙트로신테시스" 프로젝트는 지역의 퀴어 예술가를 무대 위로 호명하며, 지역의 퀴어 역사를 재구성하고 가시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이런 대규모 전시에는 비판과 우려가 뒤따른다. 학술저널 『온-큐레이팅』에 실린 브라이언 커틴(Brian Curtin)의 글 「가시성의 조건: '아시아'의 미술 큐레이팅에서 퀴어와 LGBT 사이」에서 그는 지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퀴어 큐레이팅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아시아의 퀴어 미술 전시는 서구식의 '진보와 권리 획득'이라는 단선적인 역사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한 그는 2017년 테이트 브리튼이 영국 성소수자 자유화 5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퀴어 영국 미술(Queer British Art 1861-1967)》이 국가의 법 개정을 축하하는 안전하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흘러갔던 반면, 대만·싱가포르·캄보디아 등 아시아에서 개최한 전시는 '퀴어'와 'LGBT'라는 용어 자체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도발적인 무기로 작동하고 있음을 읽어낸다.
커틴은 2017년 타이베이 현대미술관과 선프라이드 재단이 공동 주최한 《스펙트로신테시스—지금, 아시아의 LGBTQ 이슈와 예술(Asian LGBTQ Issues and Art Now)》이 동성 결혼 합헌 판결을 앞둔 대만의 진보적인 분위기를 축제로 소비하지 않고, 퀴어의 삶에 있어서 불편하고 복잡한 측면까지 전면에 내세운 점과 욕망·신체·정체성에 대한 고정된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퀴어’를 성소수자 권리·동화·인정의 장치로 환원하지 않는 큐레이팅 전략을 실현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대만이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소수자 권리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시를 그 맥락의 산물로 읽히게 만드는 구조적 한계로 작용했음을 짚고 넘어간다. 이런 점에서 서울의 전시가 국공립미술관이 아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부터 도보 10분 이내에 있는 사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전시가 호모내셔널리즘의 기념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숨 돌리게 하고, 전시가 가능했던 조건에도 의미가 따라붙기에 느끼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한국의 사립미술관으로서 규모와 위상을 갖춘 아트선재센터의 전시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전시의 개막식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화려하게 막을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축하하고, 초대받지 못한 예술가와 서로를 위로했다(나도 못 받았어). 가난과 타박, 혐오와 차별 속에서도 시각예술을 포기하지 않은 퀴어 예술가들이 살아남아 감사했고, 광장에서 쫓겨난 축제의 분위기를 회복하는 느낌을 주었다.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개막식의 열기는 전시장을 배회하며 점차 가라앉았다. 무해한 다양성. 74명(팀)의 예술가가 하나의 장 안으로 포섭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안전하게 전시되었다. 대만에서 일부 영상 작품에 연령 제한이 부과되고, 공공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퀴어 재현에 제약을 걸었던 것처럼, 섹스와 신체 접촉, 질병은 가벽과 코너에 은밀하게 가려졌다. 성소수자/퀴어 재현의 양적 증가, 독성이 제거된 아카이빙 실천, 한국의 퀴어 미술 계보를 그려보자는데 의의를 둔다면, 닿음과 오염이 부재한 전시장에는 서로의 차이를 날카롭게 확인하면서도 끝내 연결 짓기를 시도하는 친밀성의 정치보다, 안전한 정체성 정치의 울타리로 읽어낼 수 있었다.
기관의 경계(사유지) 안팎에서 또 다른 전시가 열렸다. 윗 아웃 프레임(With Out Frame, W/OF, 이하 우프)의 전시이다. 우프는 "동시대 시각매체에 존재하는 배제와 차별을 감각하여 여성, 몸, 젠더, 퀴어 등 기존의 이미지 안에서 소거된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들은 미술관, 젠더, 이름, 공동체, 집, 국가, 언어, 역사를 프레임으로 상정하고 그곳에 도착하는 일을 거부하는 상황의 전시를 열었다. 전시에 참여한 17명(팀)의 동료는 읽고 들려주고 부치기가 가능한 글쓰기, 월세와 대관료에서 해방된 웹사이트에 출입문을 열기, 정제되지 않은 말이 길을 잃어도 되는 클럽에서 퍼포먼스하기 등을 매체로 삼아 예술을 실천 중이다. 이들의 전시는 이미 승리한 인권의 역사를 자축하며 퀴어의 정치적·예술적 실천을 중단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저지한다. '한국의 서울이 여기까지 왔네!' 하면서 국가와 지역, 기관의 포용성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동료들이 이용되는 것을 저지한다. 이들은 '퀴어'가 정체성을 설명하는 명사가 아니라 여전히 제도를 교란하고 있는 동사에 가깝게 사용하며, 도리어 국가 내의 법적·사회적 갈등 한복판에 미진하게 진행되고, 가시화조차 되지 않은 차별과 부정성을 끌고 온다.
우프의 작업 중 아트선재센터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 세워진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2026)와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에 은근히 자리를 차지"하는 양승욱의 〈Beyond the Gate〉(2026)는 '본 전시'의 통일성에 교란을 일으킨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전시라는 역사적·제도적 형식을 통해 비로소 예술로 구성되며, 작품의 미적 가치나 의미는 창작 행위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되는 공간·제도·맥락·선택의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는 제롬 글리센슈타인(Jérôme Glicenstein)의 논지처럼, 의미를 생산하는 담론적 장치이자 독립적인 형식에 끼어든 작품은 전시의 의미 생산 자체에 개입한다. 퀴어가, 퀴어 이론이, 퀴어 미술의 통일성에 대한 부정이자 완결될 수 없는 영역임이 가시화됐다.
우프가 일으킨, 또는 이와 유사하게 일어났던 사건과 상황은 퀴어 미술이 '프레임'이라는 딜레마를 겪으면서도 제도 안을 오가야 하는 이유의 갈피를 잡게 해주었다. 작품으로 촘촘히 메워진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의 얼마 남지 않은 흰 벽면은 2020년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는데, 첫 번째로 떠올린 전시는 같은 장소에서 진행됐던 이미래의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아트선재센터, 2020)이다. 기성의 경계를 허무는 도착적인 욕망, 보어(vore, 집어삼키고 삼켜지는 욕망)가 화이트 큐브를 거대한 비인간 주체의 축축한 내부로 뒤바꾸는 강력한 공간 연출로 실행되었다. 관객은 점액질 액체를 빨아들이고 분출하는 기계 조각의 기괴한 소리를 따라 가벽으로 지어진 임시 복도를 통과하며 스스로 욕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서 최하늘의 〈Qculpture_YWH(Living a dual life)〉(2020)을 떠올렸다. 이성애자를 뜻하는 스트레이트(Straight)의 S를 퀴어의 Q로 단순하게 바꿔 이름 붙여진 작품이다. 당시 최하늘의 작품이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예술가들의 퀴어 형식주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 우려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활발한 전시 활동과 다작(多作)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그가 꾸린 퀴어 조각 극단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고 보았다. 2020년, 비슷한 시기에 최하늘은 개인전 《샴》(P21, 2020.5.21-6.28), 단체전 《새일꾼》(일민미술관, 2020.3.24-6.21)과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대림미술관, 2020.4.17-7.12)에 참여했고, 그의 조각들이 위치할 수 있는 무대를 넓히며 퀴어에 대한 직유적인 표현, 각각의 전시에서 발생하는 연극적인 내러티브와 더불어 일반화되었던 소수자성을 해체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즉, 최대한 다수의 연기자를 출연시키고, 그들의 연기가 모호해 보이지 않기 위해 퀴어 형식주의를 택한 연출자 최하늘을 상상했다.
이처럼 제도권과 기관의 전시는 성소수자/퀴어의 역사와 날 것의 욕망이 기록되거나 발화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다는 두려움에 채택되는, 담론적 자격을 얻기 위해 입장하는 공론장이 아니라, 전용/도용할 수 있는 형식이자 매체로 접근할 수 있다.

그림 1. 이미래, 캐리어즈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그림 2. 최하늘 〈Qculpture_YWH(Living a dual life)〉(2020)
3.
"베니스에서 갈등은 더 이상 전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바로 전시다.(In Venice, that conflict is no longer outside the exhibition. It is the exhibition.)"
다니엘 G. 안두하르(Daniel G. Andújar)가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평한 글 〈2026 베니스 비엔날레의 붕괴: 외교 결렬, 역사적 파업, 그리고 예술의 사유화(The 2026 Venice Biennale Implodes: Diplomatic Collapse, Historic Strike, and the Privatisation of Art)〉에서 현대의 전시 제도는 정치가 예술을 침범했기 때문에 망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 예술이 오랫동안 중립적인 척 가면을 쓴 채 정치를 관리하고 은폐하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국가관의 외교적 파산과 국제 심사위원단의 사퇴, 그리고 역사적인 문화 노동자들의 파업 속에서 이제 갈등은 전시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중단과 갈등 그 자체가 바로 전시의 형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중단'은 정치적 형식이었으며, 말끔한 전시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핸들러, 통역사, 경비원, 청소 노동자 등 전시 인프라를 떠받치는 노동을 가시화했다. 한편, 국가 모델이 모순 속에 침몰하는 동안 사적 자본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전진했다. 핀올트 재단, 불가리, 프라다 재단 등 기업 자본은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흡수하며 탈식민주의와 생태 담론 등 비판 언어마저 소화하고 브랜드화하는 새로운 문화의 주권자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큐레이터는 윤리성과 감수성, 그러면서도 기관이 요구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모순을 입은 노동자가 된다. 관성을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고정적인 미술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을 확보해야 하고, 기금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대학 교육과 미술 현장의 괴리 역시 높게 느껴진다. 기관은 대부분 석사 학위 이상을 요구하며, 국제 교류를 위해 외국어 회화를 기본 조건처럼 여긴다. 투자금은 크고 가방끈은 길어야 하는 매미 같은 직종이다. 단 몇 주간의 전시를 위해 수년의 시간을 투자한다.
최근에는 퀴어 이론을 바탕으로 학위 논문이 발표되는 수가 늘었지만,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예술 전공에서도 실은 '퀴어'라는 키워드를 학술 연구 주제로 채택하기는 어렵다. 미술사학은 '예술가가 타계는 해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룰이 지배적이고, 살아 움직이며 욕망하는 동시대 성소수자/퀴어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는 시도들은 아직 전문성이 결여된 것으로 취급받는다.
다시, '나'로 돌아가서.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문턱을 넘고', '탈구조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예술을 주제로 잡았을 때, 동시대 한국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주의 및 퀴어 예술가를 실제 사례로 다루는 것을 제지당했다. 대학원 지도 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기성의 예술가나 해외의 예술가로 선회할 것을 권유했다. 또한 나는 제도권 밖에서 이루어지는 참여형 공공미술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미적 경험을 제공하고 작품으로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했으나, 학계의 지도는 나에게 미술관이란 제도의 안쪽으로 들어와 '전시의 형식'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 작품으로 승인될 수 있다는 완강한 피드백을 해주었다. 나는 반쯤 설득된 채 논문을 마쳤으며, 제도 밖 퀴어 예술가들을 기어코 제도 내부로 끌고 들어와 역사화하는 것이 큐레이터와 전시의 역할인지 의심했다. 게다가 현장에 있을수록 기금에 얽매이고, 국경은 강화되고, 세계적인 미술 행사는 붕괴 중이며, 일부 동료 예술가들은 '퀴어'가 미술계에서 조커 카드로 작동한다고 시기·질투하고, 일각에서는 퀴어를 한물간 유행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그럼에도 미술관과 제도권 전시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쉽사리 말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갑자기? 처럼 느껴지겠지만, 고리타분하게 큐레이터의 어원을 끌고 와보자. '돌봄(curare)'은 현대 큐레이터십 논의에서 윤리적 태도와 역할을 강조하며 다시 소환되고 있다. 중단과 침투, 전시 형식을 전용/도용하는 퀴어 예술가의 실천은 단일하고 통일되며 동질적인 문화 노동자와 관객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개별적인 삶과 경험, 역량을 가진 복수의 관객을 지향한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성격도 바뀌게 된다. 수많은 정체성을 바탕으로 더 많은 다양한 이론이 생산될 필요가 있고, 그러한 차이를 깊이 사유하고 통합하는 작업을 요구하며, 이론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실존 양상이 드러날 때마다 전제를 갈아엎는 퀴어 이론가들의 노력처럼, 퀴어 이론이 끝나지 않았다는 지점에서 미술관은 계속해서 새로운 복수형 관객을 인식하고 전시의 형식과 문법을 갱신해 나갈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극단적인 실례를 들며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2023년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연구활동지원〉 공모에 선정되어 동료들과 함께 ‘퀴어 예술과 공간의 언어’를 연구한 적이 있다. 우리는 연구에 참여하는 성소수자/퀴어 동료 예술가부터, 활동가, 기획자, 관객의 사담부터 활발한 논의까지 안전한 공간에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결과보고회를 비공개로 돌리고, 연구진 외 참여자들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 기록물을 증빙자료로 제출했다. 이때 돌아온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연구에 대한 공유에 대한 노력이 아쉬웠다. 세미나와 연구의 절차가 결과집이나 전시에 반영되는 데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된다. 당사자성에 대한 강조가 자신들만의 폐쇄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했다. 연구 성과가 당사자 외에 다른 이들과도 공감과 공유로 이어졌으면 한다."
같은 날 서울시의회에서 '서울문화재단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안이 통과됐다는 기사를 접했다. 재단의 역할 수행과 관련하여 '시민의 문화향수 및 창의력 증진'이라는 문구를 '청소년·청년·미혼남녀·장애인·노인 등 시민의 문화향수 및 창의력 증진'으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조례안을 대표 발의한 이종배 시의원은 "서울시가 역사박물관, 미술관,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혼남녀가) 안전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됐다. 2025년 서울시립미술관은 “미혼남녀 프로그램—미술 작품과 티블렌딩의 시간, 얼그레이를 만들며 교류하고 다감각적인 감상을 나눠보세요!”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교육 프로그램 <영원히 교차하는 춤 얼그레이 만들기>를 게시했다.
심사위원은 우리의 '폐쇄'를 우려했다. 그러나 그 폐쇄야말로 제도가 끝내 흡수하지 못한 공간이었다. 공유되지 않은 것, 공개되지 않은 얼굴,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돌봄이었다. 저 밖에서는 성소수자/퀴어 청소년을 위한 미술관 인턴십 프로그램을 열거나 커뮤니티를 조직하는데, 서울시는 문화를 향유할 시민의 목록에서 그들을 누락시켰다. 미술관의 글에서 '나'를 지우는 일에 익숙한 나는, 이제 제도가 지우려는 '우리'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생각한다.
결국, 이 글은 세 꼭지의 질문을 따라 쓰였다. 첫째, 한국 퀴어 미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미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해 온 퀴어 예술가들에게 제도와 기관은 왜 필요한가. 둘째, 화이트 큐브와 미술관은 퀴어를 포섭/포용하는 장치에 머무르는 가, 아니면 퀴어 예술가가 전용하고 교란할 수 있는 하나의 형식과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셋째, 이러한 제도 안에서 일하는 기관은 다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큐레이터의 역할을 돌봄 노동의 연장선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나는 각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보다 소심하게 몇가지 단서를 덧붙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자본이 미술 생태계를 사유화하고 하얀 벽의 붕괴가 가속화되는 아찔한 시대일지라도. 나의 돌봄이 '동료'와 '시민'에게 닿을 때까지, 그리고 그 돌봄이 되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묻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까지, 미술관의 문턱에서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이다.
김한민선
미술관 안팎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공동의 미적 경험을 중심으로 대안적 공동체 형성을 실험하는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를 자주 발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픽셀 김 개인전: 꿈의 공간과 또는 알람의 시간공간》(2025), 《나쁜(애)도》(공동기획, 2025), 《플랜-t:둥지 엿보기》(2024), 《목(ㅅ)없는 자들의 구송》(2024), 《왈가다칸 굳, 쌀롱》(공동기획, 2024) 등을 기획했으며, <프로젝트 미라주: 변칙적인 퀴어(시각)예술 공간의 언어>(2023) 연구 사업을 진행했다.
이연숙, 남웅(2024), 『퀴어 미술 대담-동시대 한국 퀴어 미술의 현장』, 파주: 글항아리, 39-40쪽.↩
ICOM Korea, “박물관 정의”,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크리스 이만츠 어컴스(2019), “한국의 동시대 퀴어 미술에 대한 기초 연구 보고서”,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 결과 자료집 2018』, 131쪽. 박그림, 《화랑도》, 불일미술관 (4월 6일 ~4월 14일), 장훈, 《소문》, 대림상가 1층 아케이드 상가 (8월 29일 ~ 8월 31일), 전나환, 《Sun, Sun, Sun, Here it Comes》, 팩토리 2 (7월 6일 ~7월 21일) , 이정식, 《김무명 Faceless》, 구석으로부터 (대전) (9월 1일 ~ 9월 21일) , 오인환, 《나는 하나가 아니다》, 스페이스 윌랭앤딜링 (9월 4일 ~ 9월 28일), 듀킴(aka HornyHoneydew), 《내가 조금 더 설렐 수 있게 ♡ Purple Kiss》, 아카이브봄 (9월 6일 ~ 9월 27일), 박승혁, 《Double Dare》, 아트스페이스 형 (10월 2일 ~11월 2일) , 양승욱, 《Glass Closet》, 공;간극 (5월 7일 ~ 5월 26일) , 박진희, 《Tent Pitch》, 아트 스페이스 그로브 (11월 8일 ~11월 30일), 정은영,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 d / p (11월 6일 ~12월 8일) , 이강승, 《Garden》, 원앤제이갤러리 (11월 22일 ~12월 22일), 이 연구는 발표될 당시 한국의 남성 게이 작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점을 비판받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로잘린드 크라우스(2023), 『언더 블루 컵-포스트미디엄 시대의 예술』, 최종철(역), 서울: 현실문화A, 2023↩
https://sunpride.hk/sunpride-event-spectrosynthesis-seoul/↩
Brian Curtin, "The Terms of Visibility: Between Queer and LGBT in Curating Art in 'Asia'," on-curating.org, no. 37 (June 2017), eds. Jonathan Katz, Isabel Hufschmidt, and Änne Söll.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https://iamwritingtoyou.com/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홍희진, 「예술의 조건으로서의 전시: 제롬 글리센슈타인(Jérôme Glicenstein)의 전시 개념에 대한 이론적 재구」↩
도판 1. 《이미래: 캐리어즈》 전시 전경, 출처: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7일).↩
도판 2. 최하늘, 〈Qculpture_YWH(Living a dual life)〉(2020), 작품 사진, 출처: 「아트인사이트」, 2020.05.16., 『[Opinion] 대안적 이상향을 찾아서-“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시각예술]』.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7일).↩
Daniel G. Andújar, “The 2026 Venice Biennale Implodes: Diplomatic Collapse, Historic Strike, and the Privatisation of Art”,(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전혜은(2021), 『퀴어 이론 산책하기』, 서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618-619쪽. ↩
「JTBC news」, 2024.01.15., “미술관에서 ‘미혼남녀’ 만남 주션?...서울시 조례안 통과”,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7일).↩
「오마이뉴스」, 2025.11.12., “서울시립미술관은 왜 ‘미혼남녀’ 중매에 자출되었나”,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7일).↩
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하얀 벽의 붕괴와 돌봄의 연장선
김한민선
1.
미술관의 글에서 '나'를 지우는 데 익숙하다. 전시 서문, 보도자료, 리플렛에 실리는 작품 설명, 도슨트 프로그램을 위한 원고, 부대 행사를 홍보하는 문구 등. 소속 기관의 성격에 맞게, 개인의 경험보다 우선되는 논리에 맞추어 글을 쓴다. 학예팀의 막내 인턴부터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단 오늘까지 기관의 여러 글을 쓰면서 관객과 기관을 매개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남았고, 글 속의 '나'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관 밖에서, 퀴어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전시에서는 유독 '나'를 등장시키고 싶어 한다. 갑자기 자아가 비대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의 삶을 서두에 세우고, 낯부끄러운 고백을 기꺼워하며, 서간문으로 서문을 대체하고, 친밀한 관계를 구구절절 서술한다. 삶에 가까운 예술이 거칠어지는 것처럼, '나'가 등장하는 글은 정돈이 덜 되고, 매끄럽지 않다. 경험을 앞세워 논리가 불분명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삶과 닮아 거칠어진다는 건, 또 축축하고 끈적이는 경험의 촉감에 걸려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는 건, 매끄러운 면보다 굴곡이 많은 융털처럼 접촉면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나'들이 기대하는 효과는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기대는 이론들 역시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공적 경험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2003)의 시작을 반려견 카옌 페퍼와의 키스, 침의 교환이라는 친밀한 관계의 장면으로 열었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1999)은 저자가 자신의 뇌병변 장애인이자, 시골 백인 노동자 계급이며 트랜스젠더 퀴어로서 겪은 경험을 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글에서 자신의 삶은 이론 이전의 사례가 아니라 이론을 생산하는 조건이 되었다. ‘공적=객관적, 사적=주관적’이라는 틀 안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온 퀴어의 경험을 공론장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 이 글을 읽는 퀴어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방법론이듯, 퀴어 예술가가 자신의 삶을 끌고 들어오는 순간은 '당사자성', '진정성'을 위한 고백이 아니라 공적 언어의 부족을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또한 '나'의 거친 글들은, 우리의 삶이 하얀 종이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퀴어 미술의 시작이 하얀 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등장한 퀴어 미술을 주제로 나눈 대담, 한국 퀴어 미술에 대한 경험을 나누어 준 리타와 남웅의 노고가 담긴 고마운 책 『퀴어 미술 대담—동시대 한국 퀴어 미술의 현장』(2024)에도 묘사되는 것처럼, 한국의 퀴어 예술가들은 클럽과 모텔, 인터넷 커뮤니티, 재개발 예정 지역의 신생공간, 퀴어문화축제, 임시로 빌린 공간들 등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퀴어 미술 생태계는 기성 미술계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됐다. SNS는 전시와 이벤트를 홍보하는 수단을 넘어 서로를 발견하는 플랫폼이 되었고, 퀴어 예술 생산자들의 네트워크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확장했다.1
2022년 ICOM(국제박물관협의회)은 50년 만에 박물관 정의를 대폭 개정한다.
포용성·접근성·지속 가능성·윤리를 전면에 내세운 새 정의는, 달리 읽으면 그간 미술관이 그 어느 것도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제도가 공식적으로 '포용'을 선언하는 순간, 그 선언이 실질적 변화를 추동하는지 아니면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언어로 기능하는지 물어야 한다. 2018년은 그 물음이 제기되기 전, 현장의 분위기가 바뀌던 해였다. 박그림, 전나환, 이정식, 오인환, 듀킴, 양승욱 등의 개인전이 개최되었고, 정은영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8》을 수상했다.3 커밍아웃한 성소수자/퀴어 예술가들이 하얀 벽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다만, 신생공간과 독립 프로젝트가 활발해지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퀴어 커뮤니티가 서로를 발견하는 일이 쉬워진 시대와 맞물려 진행된 일이다. 이 시점에서 퀴어 예술가는 미술관을, 화이트 큐브를 필요로 하는가. 미술관이 대안적인 모델, 상징, 패러다임을 생성하기 위해 퀴어를 하나의 전략으로 삼고, 때로는 기관의 진보성을 과시하는 장치로 소비하며, 퀴어를 순화하고 은유하는 공간을 경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화이트 큐브는 해체와 비판 그리고 재건을 반복해 오고 있다. 매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 미술이 화이트 큐브로부터 해방을 말하지만, 예술의 자기반성 능력 강화, 역사적 맥락과 매체적 특수성을 사유하는 틀, 가치 기준이 시장에 포획되지 않도록 비평적 기준을 세우는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 화이트 큐브는 권력의 공간이 아닌,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노력을 요구한다.4 이와 맞물려 퀴어 예술가와 퀴어 미술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와 공간을 어떻게 차용하고 변형시킬 수 있나, 혹은 퀴어 미술은 그 공간 안에서 어떻게 번안할 수 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2.
2026년 3월 선프라이드 재단(Sunpride Foundation)의 《스펙트로신테시스(Spectrosynthesis)》가 한국 서울에서 개최됐다.
선프라이드 재단은 홍콩 출신 사업가 패트릭 선(Patrick Sun)이 2014년 예술을 통해 LGBTQ+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보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미션 아래 설립한 재단이며,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미술 컬렉터로 활동해 온 패트릭 선은 아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퀴어 예술과 역사를 공공 기관에서 전시하는 장기 프로젝트인 《스펙트로신테시스》를 진행하고 있다. 타이베이 현대미술관(MOCA)과 공동 주최한 첫 번째 전시는 아시아 공공 미술관에서 최초로 열린 LGBTQ+ 주제 전시였으며, 이번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시리즈의 네 번째 전시를 개최했다. 빛의 스펙트럼이 무지개를 이루듯, 다양한 정체성과 예술이 합성(synthesis)되어 새로운 가시성(visibility)을 만든다는 의미의 "스펙트로신테시스" 프로젝트는 지역의 퀴어 예술가를 무대 위로 호명하며, 지역의 퀴어 역사를 재구성하고 가시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5
다만, 이런 대규모 전시에는 비판과 우려가 뒤따른다. 학술저널 『온-큐레이팅』에 실린 브라이언 커틴(Brian Curtin)의 글 「가시성의 조건: '아시아'의 미술 큐레이팅에서 퀴어와 LGBT 사이」에서 그는 지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퀴어 큐레이팅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아시아의 퀴어 미술 전시는 서구식의 '진보와 권리 획득'이라는 단선적인 역사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한 그는 2017년 테이트 브리튼이 영국 성소수자 자유화 5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퀴어 영국 미술(Queer British Art 1861-1967)》이 국가의 법 개정을 축하하는 안전하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흘러갔던 반면, 대만·싱가포르·캄보디아 등 아시아에서 개최한 전시는 '퀴어'와 'LGBT'라는 용어 자체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도발적인 무기로 작동하고 있음을 읽어낸다.6
커틴은 2017년 타이베이 현대미술관과 선프라이드 재단이 공동 주최한 《스펙트로신테시스—지금, 아시아의 LGBTQ 이슈와 예술(Asian LGBTQ Issues and Art Now)》이 동성 결혼 합헌 판결을 앞둔 대만의 진보적인 분위기를 축제로 소비하지 않고, 퀴어의 삶에 있어서 불편하고 복잡한 측면까지 전면에 내세운 점과 욕망·신체·정체성에 대한 고정된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퀴어’를 성소수자 권리·동화·인정의 장치로 환원하지 않는 큐레이팅 전략을 실현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대만이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소수자 권리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시를 그 맥락의 산물로 읽히게 만드는 구조적 한계로 작용했음을 짚고 넘어간다. 이런 점에서 서울의 전시가 국공립미술관이 아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부터 도보 10분 이내에 있는 사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전시가 호모내셔널리즘의 기념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숨 돌리게 하고, 전시가 가능했던 조건에도 의미가 따라붙기에 느끼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한국의 사립미술관으로서 규모와 위상을 갖춘 아트선재센터의 전시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전시의 개막식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화려하게 막을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축하하고, 초대받지 못한 예술가와 서로를 위로했다(나도 못 받았어). 가난과 타박, 혐오와 차별 속에서도 시각예술을 포기하지 않은 퀴어 예술가들이 살아남아 감사했고, 광장에서 쫓겨난 축제의 분위기를 회복하는 느낌을 주었다.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개막식의 열기는 전시장을 배회하며 점차 가라앉았다. 무해한 다양성. 74명(팀)의 예술가가 하나의 장 안으로 포섭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안전하게 전시되었다. 대만에서 일부 영상 작품에 연령 제한이 부과되고, 공공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퀴어 재현에 제약을 걸었던 것처럼, 섹스와 신체 접촉, 질병은 가벽과 코너에 은밀하게 가려졌다. 성소수자/퀴어 재현의 양적 증가, 독성이 제거된 아카이빙 실천, 한국의 퀴어 미술 계보를 그려보자는데 의의를 둔다면, 닿음과 오염이 부재한 전시장에는 서로의 차이를 날카롭게 확인하면서도 끝내 연결 짓기를 시도하는 친밀성의 정치보다, 안전한 정체성 정치의 울타리로 읽어낼 수 있었다.
기관의 경계(사유지) 안팎에서 또 다른 전시가 열렸다. 윗 아웃 프레임(With Out Frame, W/OF, 이하 우프)의 전시이다. 우프는 "동시대 시각매체에 존재하는 배제와 차별을 감각하여 여성, 몸, 젠더, 퀴어 등 기존의 이미지 안에서 소거된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들은 미술관, 젠더, 이름, 공동체, 집, 국가, 언어, 역사를 프레임으로 상정하고 그곳에 도착하는 일을 거부하는 상황의 전시를 열었다.7 전시에 참여한 17명(팀)의 동료는 읽고 들려주고 부치기가 가능한 글쓰기, 월세와 대관료에서 해방된 웹사이트에 출입문을 열기, 정제되지 않은 말이 길을 잃어도 되는 클럽에서 퍼포먼스하기 등을 매체로 삼아 예술을 실천 중이다. 이들의 전시는 이미 승리한 인권의 역사를 자축하며 퀴어의 정치적·예술적 실천을 중단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저지한다. '한국의 서울이 여기까지 왔네!' 하면서 국가와 지역, 기관의 포용성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동료들이 이용되는 것을 저지한다. 이들은 '퀴어'가 정체성을 설명하는 명사가 아니라 여전히 제도를 교란하고 있는 동사에 가깝게 사용하며, 도리어 국가 내의 법적·사회적 갈등 한복판에 미진하게 진행되고, 가시화조차 되지 않은 차별과 부정성을 끌고 온다.
우프의 작업 중 아트선재센터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 세워진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2026)와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에 은근히 자리를 차지"하는 양승욱의 〈Beyond the Gate〉(2026)는 '본 전시'의 통일성에 교란을 일으킨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전시라는 역사적·제도적 형식을 통해 비로소 예술로 구성되며, 작품의 미적 가치나 의미는 창작 행위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되는 공간·제도·맥락·선택의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는 제롬 글리센슈타인(Jérôme Glicenstein)의 논지처럼, 의미를 생산하는 담론적 장치이자 독립적인 형식에 끼어든 작품은 전시의 의미 생산 자체에 개입한다.8 퀴어가, 퀴어 이론이, 퀴어 미술의 통일성에 대한 부정이자 완결될 수 없는 영역임이 가시화됐다.
우프가 일으킨, 또는 이와 유사하게 일어났던 사건과 상황은 퀴어 미술이 '프레임'이라는 딜레마를 겪으면서도 제도 안을 오가야 하는 이유의 갈피를 잡게 해주었다. 작품으로 촘촘히 메워진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의 얼마 남지 않은 흰 벽면은 2020년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는데, 첫 번째로 떠올린 전시는 같은 장소에서 진행됐던 이미래의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아트선재센터, 2020)9이다. 기성의 경계를 허무는 도착적인 욕망, 보어(vore, 집어삼키고 삼켜지는 욕망)가 화이트 큐브를 거대한 비인간 주체의 축축한 내부로 뒤바꾸는 강력한 공간 연출로 실행되었다. 관객은 점액질 액체를 빨아들이고 분출하는 기계 조각의 기괴한 소리를 따라 가벽으로 지어진 임시 복도를 통과하며 스스로 욕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서 최하늘의 〈Qculpture_YWH(Living a dual life)〉(2020)10을 떠올렸다. 이성애자를 뜻하는 스트레이트(Straight)의 S를 퀴어의 Q로 단순하게 바꿔 이름 붙여진 작품이다. 당시 최하늘의 작품이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예술가들의 퀴어 형식주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 우려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활발한 전시 활동과 다작(多作)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그가 꾸린 퀴어 조각 극단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고 보았다. 2020년, 비슷한 시기에 최하늘은 개인전 《샴》(P21, 2020.5.21-6.28), 단체전 《새일꾼》(일민미술관, 2020.3.24-6.21)과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대림미술관, 2020.4.17-7.12)에 참여했고, 그의 조각들이 위치할 수 있는 무대를 넓히며 퀴어에 대한 직유적인 표현, 각각의 전시에서 발생하는 연극적인 내러티브와 더불어 일반화되었던 소수자성을 해체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즉, 최대한 다수의 연기자를 출연시키고, 그들의 연기가 모호해 보이지 않기 위해 퀴어 형식주의를 택한 연출자 최하늘을 상상했다.
이처럼 제도권과 기관의 전시는 성소수자/퀴어의 역사와 날 것의 욕망이 기록되거나 발화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다는 두려움에 채택되는, 담론적 자격을 얻기 위해 입장하는 공론장이 아니라, 전용/도용할 수 있는 형식이자 매체로 접근할 수 있다.
그림 1. 이미래, 캐리어즈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그림 2. 최하늘 〈Qculpture_YWH(Living a dual life)〉(2020)
3.
"베니스에서 갈등은 더 이상 전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바로 전시다.(In Venice, that conflict is no longer outside the exhibition. It is the exhibition.)"
다니엘 G. 안두하르(Daniel G. Andújar)가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평한 글 〈2026 베니스 비엔날레의 붕괴: 외교 결렬, 역사적 파업, 그리고 예술의 사유화(The 2026 Venice Biennale Implodes: Diplomatic Collapse, Historic Strike, and the Privatisation of Art)〉에서 현대의 전시 제도는 정치가 예술을 침범했기 때문에 망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 예술이 오랫동안 중립적인 척 가면을 쓴 채 정치를 관리하고 은폐하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국가관의 외교적 파산과 국제 심사위원단의 사퇴, 그리고 역사적인 문화 노동자들의 파업 속에서 이제 갈등은 전시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중단과 갈등 그 자체가 바로 전시의 형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중단'은 정치적 형식이었으며, 말끔한 전시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핸들러, 통역사, 경비원, 청소 노동자 등 전시 인프라를 떠받치는 노동을 가시화했다. 한편, 국가 모델이 모순 속에 침몰하는 동안 사적 자본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전진했다. 핀올트 재단, 불가리, 프라다 재단 등 기업 자본은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흡수하며 탈식민주의와 생태 담론 등 비판 언어마저 소화하고 브랜드화하는 새로운 문화의 주권자로 부상했다.11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큐레이터는 윤리성과 감수성, 그러면서도 기관이 요구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모순을 입은 노동자가 된다. 관성을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고정적인 미술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을 확보해야 하고, 기금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대학 교육과 미술 현장의 괴리 역시 높게 느껴진다. 기관은 대부분 석사 학위 이상을 요구하며, 국제 교류를 위해 외국어 회화를 기본 조건처럼 여긴다. 투자금은 크고 가방끈은 길어야 하는 매미 같은 직종이다. 단 몇 주간의 전시를 위해 수년의 시간을 투자한다.
최근에는 퀴어 이론을 바탕으로 학위 논문이 발표되는 수가 늘었지만,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예술 전공에서도 실은 '퀴어'라는 키워드를 학술 연구 주제로 채택하기는 어렵다. 미술사학은 '예술가가 타계는 해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룰이 지배적이고, 살아 움직이며 욕망하는 동시대 성소수자/퀴어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는 시도들은 아직 전문성이 결여된 것으로 취급받는다.
다시, '나'로 돌아가서.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문턱을 넘고', '탈구조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예술을 주제로 잡았을 때, 동시대 한국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주의 및 퀴어 예술가를 실제 사례로 다루는 것을 제지당했다. 대학원 지도 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기성의 예술가나 해외의 예술가로 선회할 것을 권유했다. 또한 나는 제도권 밖에서 이루어지는 참여형 공공미술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미적 경험을 제공하고 작품으로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했으나, 학계의 지도는 나에게 미술관이란 제도의 안쪽으로 들어와 '전시의 형식'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 작품으로 승인될 수 있다는 완강한 피드백을 해주었다. 나는 반쯤 설득된 채 논문을 마쳤으며, 제도 밖 퀴어 예술가들을 기어코 제도 내부로 끌고 들어와 역사화하는 것이 큐레이터와 전시의 역할인지 의심했다. 게다가 현장에 있을수록 기금에 얽매이고, 국경은 강화되고, 세계적인 미술 행사는 붕괴 중이며, 일부 동료 예술가들은 '퀴어'가 미술계에서 조커 카드로 작동한다고 시기·질투하고, 일각에서는 퀴어를 한물간 유행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그럼에도 미술관과 제도권 전시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쉽사리 말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갑자기? 처럼 느껴지겠지만, 고리타분하게 큐레이터의 어원을 끌고 와보자. '돌봄(curare)'은 현대 큐레이터십 논의에서 윤리적 태도와 역할을 강조하며 다시 소환되고 있다. 중단과 침투, 전시 형식을 전용/도용하는 퀴어 예술가의 실천은 단일하고 통일되며 동질적인 문화 노동자와 관객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개별적인 삶과 경험, 역량을 가진 복수의 관객을 지향한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성격도 바뀌게 된다. 수많은 정체성을 바탕으로 더 많은 다양한 이론이 생산될 필요가 있고, 그러한 차이를 깊이 사유하고 통합하는 작업을 요구하며, 이론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실존 양상이 드러날 때마다 전제를 갈아엎는 퀴어 이론가들의 노력처럼, 퀴어 이론이 끝나지 않았다12는 지점에서 미술관은 계속해서 새로운 복수형 관객을 인식하고 전시의 형식과 문법을 갱신해 나갈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극단적인 실례를 들며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2023년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연구활동지원〉 공모에 선정되어 동료들과 함께 ‘퀴어 예술과 공간의 언어’를 연구한 적이 있다. 우리는 연구에 참여하는 성소수자/퀴어 동료 예술가부터, 활동가, 기획자, 관객의 사담부터 활발한 논의까지 안전한 공간에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결과보고회를 비공개로 돌리고, 연구진 외 참여자들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 기록물을 증빙자료로 제출했다. 이때 돌아온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연구에 대한 공유에 대한 노력이 아쉬웠다. 세미나와 연구의 절차가 결과집이나 전시에 반영되는 데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된다. 당사자성에 대한 강조가 자신들만의 폐쇄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했다. 연구 성과가 당사자 외에 다른 이들과도 공감과 공유로 이어졌으면 한다."
같은 날 서울시의회에서 '서울문화재단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안이 통과됐다는 기사를 접했다. 재단의 역할 수행과 관련하여 '시민의 문화향수 및 창의력 증진'이라는 문구를 '청소년·청년·미혼남녀·장애인·노인 등 시민의 문화향수 및 창의력 증진'으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조례안을 대표 발의한 이종배 시의원은 "서울시가 역사박물관, 미술관,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혼남녀가) 안전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13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됐다. 2025년 서울시립미술관은 “미혼남녀 프로그램—미술 작품과 티블렌딩의 시간, 얼그레이를 만들며 교류하고 다감각적인 감상을 나눠보세요!”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교육 프로그램 <영원히 교차하는 춤 얼그레이 만들기>14를 게시했다.
심사위원은 우리의 '폐쇄'를 우려했다. 그러나 그 폐쇄야말로 제도가 끝내 흡수하지 못한 공간이었다. 공유되지 않은 것, 공개되지 않은 얼굴,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돌봄이었다. 저 밖에서는 성소수자/퀴어 청소년을 위한 미술관 인턴십 프로그램을 열거나 커뮤니티를 조직하는데, 서울시는 문화를 향유할 시민의 목록에서 그들을 누락시켰다. 미술관의 글에서 '나'를 지우는 일에 익숙한 나는, 이제 제도가 지우려는 '우리'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생각한다.
결국, 이 글은 세 꼭지의 질문을 따라 쓰였다. 첫째, 한국 퀴어 미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미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해 온 퀴어 예술가들에게 제도와 기관은 왜 필요한가. 둘째, 화이트 큐브와 미술관은 퀴어를 포섭/포용하는 장치에 머무르는 가, 아니면 퀴어 예술가가 전용하고 교란할 수 있는 하나의 형식과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셋째, 이러한 제도 안에서 일하는 기관은 다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큐레이터의 역할을 돌봄 노동의 연장선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나는 각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보다 소심하게 몇가지 단서를 덧붙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자본이 미술 생태계를 사유화하고 하얀 벽의 붕괴가 가속화되는 아찔한 시대일지라도. 나의 돌봄이 '동료'와 '시민'에게 닿을 때까지, 그리고 그 돌봄이 되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묻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까지, 미술관의 문턱에서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이다.
김한민선
미술관 안팎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공동의 미적 경험을 중심으로 대안적 공동체 형성을 실험하는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를 자주 발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픽셀 김 개인전: 꿈의 공간과 또는 알람의 시간공간》(2025), 《나쁜(애)도》(공동기획, 2025), 《플랜-t:둥지 엿보기》(2024), 《목(ㅅ)없는 자들의 구송》(2024), 《왈가다칸 굳, 쌀롱》(공동기획, 2024) 등을 기획했으며, <프로젝트 미라주: 변칙적인 퀴어(시각)예술 공간의 언어>(2023) 연구 사업을 진행했다.
이연숙, 남웅(2024), 『퀴어 미술 대담-동시대 한국 퀴어 미술의 현장』, 파주: 글항아리, 39-40쪽.↩
ICOM Korea, “박물관 정의”,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크리스 이만츠 어컴스(2019), “한국의 동시대 퀴어 미술에 대한 기초 연구 보고서”,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 결과 자료집 2018』, 131쪽. 박그림, 《화랑도》, 불일미술관 (4월 6일 ~4월 14일), 장훈, 《소문》, 대림상가 1층 아케이드 상가 (8월 29일 ~ 8월 31일), 전나환, 《Sun, Sun, Sun, Here it Comes》, 팩토리 2 (7월 6일 ~7월 21일) , 이정식, 《김무명 Faceless》, 구석으로부터 (대전) (9월 1일 ~ 9월 21일) , 오인환, 《나는 하나가 아니다》, 스페이스 윌랭앤딜링 (9월 4일 ~ 9월 28일), 듀킴(aka HornyHoneydew), 《내가 조금 더 설렐 수 있게 ♡ Purple Kiss》, 아카이브봄 (9월 6일 ~ 9월 27일), 박승혁, 《Double Dare》, 아트스페이스 형 (10월 2일 ~11월 2일) , 양승욱, 《Glass Closet》, 공;간극 (5월 7일 ~ 5월 26일) , 박진희, 《Tent Pitch》, 아트 스페이스 그로브 (11월 8일 ~11월 30일), 정은영,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 d / p (11월 6일 ~12월 8일) , 이강승, 《Garden》, 원앤제이갤러리 (11월 22일 ~12월 22일), 이 연구는 발표될 당시 한국의 남성 게이 작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점을 비판받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로잘린드 크라우스(2023), 『언더 블루 컵-포스트미디엄 시대의 예술』, 최종철(역), 서울: 현실문화A, 2023↩
https://sunpride.hk/sunpride-event-spectrosynthesis-seoul/↩
Brian Curtin, "The Terms of Visibility: Between Queer and LGBT in Curating Art in 'Asia'," on-curating.org, no. 37 (June 2017), eds. Jonathan Katz, Isabel Hufschmidt, and Änne Söll.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https://iamwritingtoyou.com/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홍희진, 「예술의 조건으로서의 전시: 제롬 글리센슈타인(Jérôme Glicenstein)의 전시 개념에 대한 이론적 재구」↩
도판 1. 《이미래: 캐리어즈》 전시 전경, 출처: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7일).↩
도판 2. 최하늘, 〈Qculpture_YWH(Living a dual life)〉(2020), 작품 사진, 출처: 「아트인사이트」, 2020.05.16., 『[Opinion] 대안적 이상향을 찾아서-“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시각예술]』.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7일).↩
Daniel G. Andújar, “The 2026 Venice Biennale Implodes: Diplomatic Collapse, Historic Strike, and the Privatisation of Art”,(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5일).↩
전혜은(2021), 『퀴어 이론 산책하기』, 서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618-619쪽. ↩
「JTBC news」, 2024.01.15., “미술관에서 ‘미혼남녀’ 만남 주션?...서울시 조례안 통과”,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7일).↩
「오마이뉴스」, 2025.11.12., “서울시립미술관은 왜 ‘미혼남녀’ 중매에 자출되었나”, (최종검색일 2026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