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기록되지 않을 것들의 시간
공공성의 해석과 저항성의 위치
이준영
2026년 5월 개막한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풍경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비판하고 ‘아트워싱(artwashing)’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전시에 참여한 창작자들로부터 전시 내부의 장치를 통해 제시된 것이다. 본전시에 참여한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가려지도록 작품에 포스터를 붙이거나 진입 경로를 차단했다. 일부 국가관은 특정 날짜에는 개방하지 않았다. 본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이 광경은 필자의 기억에는 뚜렷이 남았지만 아직 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만 그 모습을 보며 사회 참여적이고 저항적인 미술과 그것을 계속하여 호출하는 공고한 미술 제도, 그 사이에서 의미 있는 ‘저항’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결단하는 창작자들의 마음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참여작가들이 보여준 행동은 가시적인 형태를 띠고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와 유사한 일이 비단 국제 비엔날레라는 특수한 무대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스스로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동료들이 미술 제도 안에 속해있으면서도 그 제도와의 긴장을 관념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다고 관찰하였다. 이러한 관찰에서 출발하여 이 글은 제도가 저항적 미술, 그리고 퀴어 미술과 맺는 관계의 일면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의 ‘제도’는 미술관, 비엔날레 등의 국공립 전시 기관과 시스템 및 국가 예술지원 체계를 포괄하는 장을 가리킨다. 다만 이 글은 한국 미술 현장의 구체적인 지형도를 그리는 대신, 공공성의 경합과 시간성의 문제를 축으로 삼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떤 저항성이 제도가 흡수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어떠한 것이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로 남겨지는지에 대한 질문을 이 글에서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2016년 블랙리스트 사건은 명시적인 검열을 통해 창작자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그 이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미술의 저항성을 흡수하고 규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오기도 했다. 아방가르드가 대표하는 미술의 어떤 속성, 즉 미술 제도 자체에 대한 저항조차도 다시 그 제도의 일부로 포섭하는 속성은 과거의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The New Spirit of Capitalism)』에서 볼탕스키(Luc Boltanski)와 시아펠로(Ève Chiapello)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 아방가르드의 현재적 유산이다. 20세기 전반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받은 68혁명 세대가 이후 교육과 언론 등에서 문화적 권력을 확보하면서, 예술가의 이상주의와 경제 엘리트의 현실주의로 구분되던 영역이 결합하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방가르드를 특징 지었던 전복적(transgressive)인 것과 금기(taboo)에 관한 것이 상품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즉 기존에 표면화되기 어려웠던 다양한 형식과 주제가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효과가 있는 동시에 그것이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게 되며 그 특유의 저항성이 마모되는 효과 또한 공존하는 것이다.
토니 베넷(Tony Bennett) 또한 현대 문화에서 나타나는 저항성은 억압에 대한 반동으로 자생했다기보다는 문화 전반이 국가의 통치와 연관됨으로써 나타나는 부수적 효과임을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문화에 부여된 보편적 인간성과 평등주의적 규범이 공공 문화기관에 기대하는 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미술관에 대한 이러한 규범적 기대는 소수자성과 저항적 움직임의 재현을 미술관의 과업으로 만들었고, 이는 현재의 사회참여적·저항적 미술이 미술 제도와 맺는 관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국제적인 정전화(canonization)의 경로를 거친 미술은 미술관에 요구되는 공공적인 역할과 접점을 만들며 한국의 미술 제도 내부에서 비교적 수용 가능한 내용과 형식으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치적 국면과 직접 결부된 실천은 매끄럽게 그 내부로 흡수되지는 않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정전화의 역학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미술 또한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사회참여적·저항적 미술이 제도와 맺는 관계와 그 의미는 단일하게 종합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예술이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제도 내에서의 인정과 일종의 정전화로 이어지는 흐름은 현대에 들어 국가 예술지원이라는 변수를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미술관의 소장과 전시를 통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전화가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미술관 바깥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특히 창작자에 대한 국가의 예술지원은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현대적인 형태의 정전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축으로 기능한다. 창작지원 공모 사업은 높은 경쟁률로 인해 다수의 ‘배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매년 일정 시기에 공식화되는 지원 선정자 목록은 경제적 지원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이듬해 주목할 만한 창작자를 발표한 목록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제도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볼탕스키와 시아펠로가 강조한 것처럼 자율성과 창의성, 네트워크 확장 능력은 개인의 중요한 자질이자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예술 지원의 자명한 순기능, 즉 경제적인 지원이 없다면 현실화되기 어려운 실험적인 실천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브라이언 월리스(Brian Wallis)는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이 1970-80년대 미국 전역의 풀뿌리 예술 기관과 조직,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s)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원이 관료주의적·행정적 요구에 대한 순응과 사회적 통제, 이로 인한 실험적 실천의 감소로 서서히 작동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뉴욕의 전시공간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선제적으로 검열”하는 상황은 조쉬 클라인(Josh Kline)이 지적하듯 2026년 현재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검열은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지원 기관이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도 일어난다. ‘공공성’은 단일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지속적으로 경합하는 개념이지만 제도는 이 정의하기 어려운 공공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상상하고 그것을 전제하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미술의 저항성은 제도 내부에서 길을 찾기도 하지만 바로 그 공공성에 대한 요구 때문에 길을 잃기도 한다. 1990년 NEA는 섹슈얼리티와 동성애 등을 다루는, 이미 심사를 통과한 네 명의 작가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 ‘미국 대중의 다양한 신념과 가치에 대한 품위와 존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항이 도입되자 작가들은 이에 맞서 소송했고, 사건은 위헌 논쟁을 거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미술관의 사례를 보자면, 2010년 스미스소니언 국립초상화미술관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현대미술의 내용과 형식 발전에 기여한 바를 중심으로 기획한 전시 《Hide/Seek: Difference and Desire in American Portraiture》를 연 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외압에 의해 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의 영상을 철거했다. 유사한 일이 놀랍게도 2025년 같은 미술관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이러한 통제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에이미 셰럴드(Amy Sherald)는 트랜스젠더 모델을 자유의 여신상 모습으로 묘사한 회화 작품 〈Trans Forming Liberty〉(2024)가 정치적 상황 속에서 미술관의 검토로 전시가 어려워지자 전시를 자진 취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선 행정명령에서 “공유된 미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전시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만들었다. 비록 미국에 한정된 사례이지만, 이 사건들은 공적 기관이 필요에 따라 공공성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불투명한 ‘사회적 합의’를 명목으로 퀴어 미술을 들이는 문과 통제하고 차단하는 문턱을 동시에 가진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흡수와 배제의 역학은 공간적·담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시간적 차원을 함께 포함한다. ‘오늘날 무엇이 저항적인 미술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떤 시간성 안에서 우리가 저항성을 다룰 수 있게 되는가’로 옮겨 간다. 수많은 전시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늘 늦을 수밖에 없어, 마주하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남은 한 줄의 기록뿐일 때가 있다.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깨닫는 만큼 우리는 눈앞의 작품보다 그것이 기록되는 방식에 더 강한 힘을 쥐어주게 된다. 그레고리 숄레트(Gregory Sholette)는 미술계에서 가시화되는 소수의 작가와 작품이 사실은 가시화되지 못하는 거대한 비공식적 실천들 위에 떠 있다는 점을 ‘암흑 물질(dark matter)’이라는 비유로 설명한다. 자기조직적이고 비공식적인 모임과 네트워크, 한 줄의 이력으로도 남지 못하는 무수한 활동들이 미술계의 보이지 않는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정전화에 내재한 시간의 축을 이 암흑 물질에 적용해 보면, 그것은 가시화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정전화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은 것, 혹은 그 시간을 끝내 거치지 않을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정전화의 시간선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기록에 남지 않을 숱한 실천들을 직접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목격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야말로 제도가 가장 인색하게 분배하는 자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각종 기관에서 과거의 시작점을 주기적으로 기념하는 관례를 마주하게 된다. 무형의 기념비가 무수히 세워지는 가운데 현재는 곧잘 지나갈 것, 과거의 것으로 상상됨을 목격한다. 하지만 현재를 충분히 관찰할 틈 없이 곧바로 미래에 투사하며 기념비가 되는 시점을 상상하는 것은 실존하는 저항과 갈등의 버겁고 불편한 면을 지워버리는 방법일 수 있다.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자신의 글에서 틀링깃(Tlingit) 부족이 포틀랜드 미술관 소장품에 포함된 자신들의 오브제에 대해 설명하길 요청 받은 자리에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 대신 당시 진행 중이던 미국 정부와의 갈등, 즉 빼앗긴 토지 문제에 대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펼쳤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오브제의 의미를 충실히 기록하고 재현하려는 미술관의 의도 자체가, 역설적으로 오브제의 다층적 의미와 현재의 위치를 지우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술관에서 이 충돌하는 시간성을 관찰할 수 있는 최근의 사건으로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아카이브에서 열린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가 있다. 이 전시는 아카이브의 정치성과 저항의 기억을 축으로 삼아, 제주 4.3 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민주화 운동, 그리고 한국 퀴어 역사와 성소수자를 다룬 주제에 이르는 굵직한 폭력과 그에 맞선 흔적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전시는 제주4·3평화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의 자료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공적 기록이 담지 못한 역사를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축적해 온 아카이브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앞서 언급한 ‘암흑 물질’이 제도의 주변부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서술해 온 셈이다.
그러나 도록에 실릴 평론에서 2024년 계엄 선포를 비판한 서두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게재 불가 통보를 받으며 검열 논란이 일었다. 글을 청탁받은 평론가 남웅은 이 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였으며,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이 활동하는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웹진을 통해 공론화했다. 이 사건은 제도가 포함과 배제를 수행하는 두 가지 양상을 동시에 드러냈다. 하나는 제도적 ‘공인’과 ‘검열’이라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성을 기준으로 삼은 ‘수용’과 ‘배제’이다. 쟁점은 이 네 가지 수행이 모두 ‘공공성’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견지하게끔 구조화된다는 것이다. 우선 ‘공인’과 ‘검열’은 제도가 권위를 부여한 평론가가 다시 제도 내부에서 검열되었다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수용’과 ‘배제’의 양상은 그 검열의 내용에서 나타난다. 제주 4.3, 위안부, 민주화 운동은 지금도 진행 중인 진상 조사와 논의의 장 안에 놓여 있지만 ‘아카이브’를 축으로 회고적으로 다룰 수 있었고, 한국 퀴어 역사 또한 자기조직적 아카이브를 통해 또 다른 시간성을 축으로 조명되었다. 반면 거의 실시간으로 일어난 정치적 사건 앞에서 제도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처럼 ‘공공성’ 개념의 경합성이 공적 기관의 수용성과 배타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양가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을 축으로 드러나며, 회고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건과 현재 진행형의 갈등 사이의 비대칭은 식민주의적 박물관의 잔재에 그치지 않는다. 핼 포스터(Hal Foster)는 아방가르드의 의미가 시간적인 단절과 발굴을 통해 사후적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시차를 통해서만 가능한 의미 생산에 대해 논의했다. 그렇지만 정전화의 시간이 도래하기 전에도 우리 모두는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 현재에는 훗날 사후적으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실천들도 있겠지만, 정전화의 역학 자체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무수한 ‘암흑 물질’ 또한 함께 있다.
최근 10여 년간 전시 기획과 미술 교육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탈배움(unlearning)’, ‘탈출(escape)’, ‘탈주적(fugitive)’이라는 개념들은 이미 익숙해진 관습과 제도를 의식하고 그로부터 거리두기를 요청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단어들 앞에서 안도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제도에 균열을 내는 사유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고착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에는 유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단순한 도피주의가 아니라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유효한 방안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현재를 외면한 채 기념비를 세우려는 욕망을 의식하는 것은 필자가 떠올리는 개인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제도 안에서 일하면서 그 외부를 사유하는 일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윤리적 작업일지도 모른다. 기록될 것과 기록되지 않을 것을 구분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현재의 갈등을 그 자체로 증언하는 것, 그리고 동료들과 그 증언을 나누는 것. 미술에 대한 모든 순수한 동력과 욕망, 즐거움, 초심자의 마음, 대화, 원한다면 언제든지 지배적인 정전화의 원리로부터 잠시나마 탈주할 수 있다는 상상.
이준영
독립 큐레이터이자 연구자로, 미술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조건과 인프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동시대 한국 미술 현장에서 공적 예술지원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와 서울여대에 출강 중이다.
Boltanski, Luc, Ève Chiapello(2018), “Chapter 5: Undermining the Defences of the World of Work”, The New Spirit of Capitalism, tr. by Gregory Elliott, London: Verso.↩
Bennett, Tony(1992), “Useful Culture”, Cultural Studies, 6(3): 403-404.↩
Wallis, Brian(2002), “Public Funding and Alternative Spaces”, in Julie Ault(eds.), Alternative Art New York, 1965-1985,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 178.↩
Kline, Josh(2026), “New York Real Estate and the Ruin of American Art”, October, (195): 94.↩
McInnis, Tom(2009),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v. Finley (1998)”, The First Amendment Encyclopedia, Middle Tennessee State University,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3일).↩
「ABC News」, 2010.12.03., “Art or Hate Speech? Video of Ants Crawling on Crucifix Pulled from Smithsonian”,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3일).↩
「CNN」, 2025.07.24., “Artist Amy Sherald cancels major Smithsonian exhibition, citing censorship”,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3일).↩
Sholette, Gregory(2011), Dark Matter: Art and Politics in the Age of Enterprise Culture, London: Pluto Press, p. 1.↩
Clifford, James(1997), “Museums as Contact Zones”, Routes: Travel and Transl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88-191.↩
「한국일보」, 2025.06.04., "'계엄 비판' 비평 뺀 서울시립미술관, 왜?... '정치적 검열'", (최종검색일 2026년 06월 03일).↩
한국일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전시에서 다룬 사건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거리가 생긴 사건이지만 계엄은 진행 중인 현실 정치의 사건으로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는 미술관 관계자의 발화는 이 시간성의 문제가 작동하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Foster, Hal(1996), “Who's Afraid of the Neo-Avant-Garde?”,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Cambridge, MA: MIT Press, pp. 8-13.↩
각 개념의 사용 사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Mörsch, Carmen(2011), “Alliances for Unlearning: On the Possibility of Future Collaborations Between Gallery Education and Institutions of Critique”, Afterall: A Journal of Art, Context and Enquiry, (26): 5-13; 오닐, 폴(2019), 「탈출을 위한 큐레토리얼 레디메이드 형식으로의 전시」,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147-161쪽; 로고프, 이릿(2019), 「연구가 되기」,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41-54쪽.↩
5호(2026.6.) l 지금 여기에서의 퀴어 미술
기록되지 않을 것들의 시간
공공성의 해석과 저항성의 위치
이준영
2026년 5월 개막한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풍경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비판하고 ‘아트워싱(artwashing)’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전시에 참여한 창작자들로부터 전시 내부의 장치를 통해 제시된 것이다. 본전시에 참여한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가려지도록 작품에 포스터를 붙이거나 진입 경로를 차단했다. 일부 국가관은 특정 날짜에는 개방하지 않았다. 본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이 광경은 필자의 기억에는 뚜렷이 남았지만 아직 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만 그 모습을 보며 사회 참여적이고 저항적인 미술과 그것을 계속하여 호출하는 공고한 미술 제도, 그 사이에서 의미 있는 ‘저항’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결단하는 창작자들의 마음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참여작가들이 보여준 행동은 가시적인 형태를 띠고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와 유사한 일이 비단 국제 비엔날레라는 특수한 무대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스스로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동료들이 미술 제도 안에 속해있으면서도 그 제도와의 긴장을 관념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다고 관찰하였다. 이러한 관찰에서 출발하여 이 글은 제도가 저항적 미술, 그리고 퀴어 미술과 맺는 관계의 일면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의 ‘제도’는 미술관, 비엔날레 등의 국공립 전시 기관과 시스템 및 국가 예술지원 체계를 포괄하는 장을 가리킨다. 다만 이 글은 한국 미술 현장의 구체적인 지형도를 그리는 대신, 공공성의 경합과 시간성의 문제를 축으로 삼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떤 저항성이 제도가 흡수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어떠한 것이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로 남겨지는지에 대한 질문을 이 글에서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2016년 블랙리스트 사건은 명시적인 검열을 통해 창작자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그 이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미술의 저항성을 흡수하고 규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오기도 했다. 아방가르드가 대표하는 미술의 어떤 속성, 즉 미술 제도 자체에 대한 저항조차도 다시 그 제도의 일부로 포섭하는 속성은 과거의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The New Spirit of Capitalism)』에서 볼탕스키(Luc Boltanski)와 시아펠로(Ève Chiapello)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 아방가르드의 현재적 유산이다. 20세기 전반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받은 68혁명 세대가 이후 교육과 언론 등에서 문화적 권력을 확보하면서, 예술가의 이상주의와 경제 엘리트의 현실주의로 구분되던 영역이 결합하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방가르드를 특징 지었던 전복적(transgressive)인 것과 금기(taboo)에 관한 것이 상품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1 즉 기존에 표면화되기 어려웠던 다양한 형식과 주제가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효과가 있는 동시에 그것이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게 되며 그 특유의 저항성이 마모되는 효과 또한 공존하는 것이다.
토니 베넷(Tony Bennett) 또한 현대 문화에서 나타나는 저항성은 억압에 대한 반동으로 자생했다기보다는 문화 전반이 국가의 통치와 연관됨으로써 나타나는 부수적 효과임을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문화에 부여된 보편적 인간성과 평등주의적 규범이 공공 문화기관에 기대하는 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2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미술관에 대한 이러한 규범적 기대는 소수자성과 저항적 움직임의 재현을 미술관의 과업으로 만들었고, 이는 현재의 사회참여적·저항적 미술이 미술 제도와 맺는 관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국제적인 정전화(canonization)의 경로를 거친 미술은 미술관에 요구되는 공공적인 역할과 접점을 만들며 한국의 미술 제도 내부에서 비교적 수용 가능한 내용과 형식으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치적 국면과 직접 결부된 실천은 매끄럽게 그 내부로 흡수되지는 않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정전화의 역학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미술 또한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사회참여적·저항적 미술이 제도와 맺는 관계와 그 의미는 단일하게 종합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예술이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제도 내에서의 인정과 일종의 정전화로 이어지는 흐름은 현대에 들어 국가 예술지원이라는 변수를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미술관의 소장과 전시를 통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전화가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미술관 바깥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특히 창작자에 대한 국가의 예술지원은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현대적인 형태의 정전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축으로 기능한다. 창작지원 공모 사업은 높은 경쟁률로 인해 다수의 ‘배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매년 일정 시기에 공식화되는 지원 선정자 목록은 경제적 지원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이듬해 주목할 만한 창작자를 발표한 목록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제도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볼탕스키와 시아펠로가 강조한 것처럼 자율성과 창의성, 네트워크 확장 능력은 개인의 중요한 자질이자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예술 지원의 자명한 순기능, 즉 경제적인 지원이 없다면 현실화되기 어려운 실험적인 실천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브라이언 월리스(Brian Wallis)는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이 1970-80년대 미국 전역의 풀뿌리 예술 기관과 조직,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s)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원이 관료주의적·행정적 요구에 대한 순응과 사회적 통제, 이로 인한 실험적 실천의 감소로 서서히 작동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3 뉴욕의 전시공간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선제적으로 검열”하는 상황은 조쉬 클라인(Josh Kline)이 지적하듯 2026년 현재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4 자기 자신에 대한 검열은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지원 기관이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도 일어난다. ‘공공성’은 단일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지속적으로 경합하는 개념이지만 제도는 이 정의하기 어려운 공공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상상하고 그것을 전제하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미술의 저항성은 제도 내부에서 길을 찾기도 하지만 바로 그 공공성에 대한 요구 때문에 길을 잃기도 한다. 1990년 NEA는 섹슈얼리티와 동성애 등을 다루는, 이미 심사를 통과한 네 명의 작가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 ‘미국 대중의 다양한 신념과 가치에 대한 품위와 존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항이 도입되자 작가들은 이에 맞서 소송했고, 사건은 위헌 논쟁을 거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5 미술관의 사례를 보자면, 2010년 스미스소니언 국립초상화미술관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현대미술의 내용과 형식 발전에 기여한 바를 중심으로 기획한 전시 《Hide/Seek: Difference and Desire in American Portraiture》를 연 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외압에 의해 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의 영상을 철거했다.6 유사한 일이 놀랍게도 2025년 같은 미술관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이러한 통제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에이미 셰럴드(Amy Sherald)는 트랜스젠더 모델을 자유의 여신상 모습으로 묘사한 회화 작품 〈Trans Forming Liberty〉(2024)가 정치적 상황 속에서 미술관의 검토로 전시가 어려워지자 전시를 자진 취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선 행정명령에서 “공유된 미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전시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만들었다.7 비록 미국에 한정된 사례이지만, 이 사건들은 공적 기관이 필요에 따라 공공성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불투명한 ‘사회적 합의’를 명목으로 퀴어 미술을 들이는 문과 통제하고 차단하는 문턱을 동시에 가진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흡수와 배제의 역학은 공간적·담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시간적 차원을 함께 포함한다. ‘오늘날 무엇이 저항적인 미술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떤 시간성 안에서 우리가 저항성을 다룰 수 있게 되는가’로 옮겨 간다. 수많은 전시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늘 늦을 수밖에 없어, 마주하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남은 한 줄의 기록뿐일 때가 있다.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깨닫는 만큼 우리는 눈앞의 작품보다 그것이 기록되는 방식에 더 강한 힘을 쥐어주게 된다. 그레고리 숄레트(Gregory Sholette)는 미술계에서 가시화되는 소수의 작가와 작품이 사실은 가시화되지 못하는 거대한 비공식적 실천들 위에 떠 있다는 점을 ‘암흑 물질(dark matter)’이라는 비유로 설명한다. 자기조직적이고 비공식적인 모임과 네트워크, 한 줄의 이력으로도 남지 못하는 무수한 활동들이 미술계의 보이지 않는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다.8 정전화에 내재한 시간의 축을 이 암흑 물질에 적용해 보면, 그것은 가시화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정전화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은 것, 혹은 그 시간을 끝내 거치지 않을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정전화의 시간선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기록에 남지 않을 숱한 실천들을 직접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목격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야말로 제도가 가장 인색하게 분배하는 자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각종 기관에서 과거의 시작점을 주기적으로 기념하는 관례를 마주하게 된다. 무형의 기념비가 무수히 세워지는 가운데 현재는 곧잘 지나갈 것, 과거의 것으로 상상됨을 목격한다. 하지만 현재를 충분히 관찰할 틈 없이 곧바로 미래에 투사하며 기념비가 되는 시점을 상상하는 것은 실존하는 저항과 갈등의 버겁고 불편한 면을 지워버리는 방법일 수 있다.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자신의 글에서 틀링깃(Tlingit) 부족이 포틀랜드 미술관 소장품에 포함된 자신들의 오브제에 대해 설명하길 요청 받은 자리에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 대신 당시 진행 중이던 미국 정부와의 갈등, 즉 빼앗긴 토지 문제에 대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펼쳤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오브제의 의미를 충실히 기록하고 재현하려는 미술관의 의도 자체가, 역설적으로 오브제의 다층적 의미와 현재의 위치를 지우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9
우리나라의 미술관에서 이 충돌하는 시간성을 관찰할 수 있는 최근의 사건으로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아카이브에서 열린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가 있다. 이 전시는 아카이브의 정치성과 저항의 기억을 축으로 삼아, 제주 4.3 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민주화 운동, 그리고 한국 퀴어 역사와 성소수자를 다룬 주제에 이르는 굵직한 폭력과 그에 맞선 흔적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전시는 제주4·3평화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의 자료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공적 기록이 담지 못한 역사를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축적해 온 아카이브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앞서 언급한 ‘암흑 물질’이 제도의 주변부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서술해 온 셈이다.
그러나 도록에 실릴 평론에서 2024년 계엄 선포를 비판한 서두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게재 불가 통보를 받으며 검열 논란이 일었다. 글을 청탁받은 평론가 남웅은 이 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였으며,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이 활동하는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웹진을 통해 공론화했다.10 이 사건은 제도가 포함과 배제를 수행하는 두 가지 양상을 동시에 드러냈다. 하나는 제도적 ‘공인’과 ‘검열’이라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성을 기준으로 삼은 ‘수용’과 ‘배제’이다. 쟁점은 이 네 가지 수행이 모두 ‘공공성’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견지하게끔 구조화된다는 것이다. 우선 ‘공인’과 ‘검열’은 제도가 권위를 부여한 평론가가 다시 제도 내부에서 검열되었다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수용’과 ‘배제’의 양상은 그 검열의 내용에서 나타난다. 제주 4.3, 위안부, 민주화 운동은 지금도 진행 중인 진상 조사와 논의의 장 안에 놓여 있지만 ‘아카이브’를 축으로 회고적으로 다룰 수 있었고, 한국 퀴어 역사 또한 자기조직적 아카이브를 통해 또 다른 시간성을 축으로 조명되었다. 반면 거의 실시간으로 일어난 정치적 사건 앞에서 제도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11
이처럼 ‘공공성’ 개념의 경합성이 공적 기관의 수용성과 배타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양가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을 축으로 드러나며, 회고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건과 현재 진행형의 갈등 사이의 비대칭은 식민주의적 박물관의 잔재에 그치지 않는다. 핼 포스터(Hal Foster)는 아방가르드의 의미가 시간적인 단절과 발굴을 통해 사후적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시차를 통해서만 가능한 의미 생산에 대해 논의했다.12 그렇지만 정전화의 시간이 도래하기 전에도 우리 모두는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 현재에는 훗날 사후적으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실천들도 있겠지만, 정전화의 역학 자체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무수한 ‘암흑 물질’ 또한 함께 있다.
최근 10여 년간 전시 기획과 미술 교육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탈배움(unlearning)’, ‘탈출(escape)’, ‘탈주적(fugitive)’이라는 개념들은 이미 익숙해진 관습과 제도를 의식하고 그로부터 거리두기를 요청한다는 공통점이 있다.13 이러한 단어들 앞에서 안도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제도에 균열을 내는 사유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고착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에는 유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단순한 도피주의가 아니라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유효한 방안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현재를 외면한 채 기념비를 세우려는 욕망을 의식하는 것은 필자가 떠올리는 개인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제도 안에서 일하면서 그 외부를 사유하는 일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윤리적 작업일지도 모른다. 기록될 것과 기록되지 않을 것을 구분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현재의 갈등을 그 자체로 증언하는 것, 그리고 동료들과 그 증언을 나누는 것. 미술에 대한 모든 순수한 동력과 욕망, 즐거움, 초심자의 마음, 대화, 원한다면 언제든지 지배적인 정전화의 원리로부터 잠시나마 탈주할 수 있다는 상상.
이준영
독립 큐레이터이자 연구자로, 미술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조건과 인프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동시대 한국 미술 현장에서 공적 예술지원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와 서울여대에 출강 중이다.
Boltanski, Luc, Ève Chiapello(2018), “Chapter 5: Undermining the Defences of the World of Work”, The New Spirit of Capitalism, tr. by Gregory Elliott, London: Verso.↩
Bennett, Tony(1992), “Useful Culture”, Cultural Studies, 6(3): 403-404.↩
Wallis, Brian(2002), “Public Funding and Alternative Spaces”, in Julie Ault(eds.), Alternative Art New York, 1965-1985,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 178.↩
Kline, Josh(2026), “New York Real Estate and the Ruin of American Art”, October, (195): 94.↩
McInnis, Tom(2009),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v. Finley (1998)”, The First Amendment Encyclopedia, Middle Tennessee State University,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3일).↩
「ABC News」, 2010.12.03., “Art or Hate Speech? Video of Ants Crawling on Crucifix Pulled from Smithsonian”,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3일).↩
「CNN」, 2025.07.24., “Artist Amy Sherald cancels major Smithsonian exhibition, citing censorship”, (최종검색일 2026년 6월 3일).↩
Sholette, Gregory(2011), Dark Matter: Art and Politics in the Age of Enterprise Culture, London: Pluto Press, p. 1.↩
Clifford, James(1997), “Museums as Contact Zones”, Routes: Travel and Transl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88-191.↩
「한국일보」, 2025.06.04., "'계엄 비판' 비평 뺀 서울시립미술관, 왜?... '정치적 검열'", (최종검색일 2026년 06월 03일).↩
한국일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전시에서 다룬 사건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거리가 생긴 사건이지만 계엄은 진행 중인 현실 정치의 사건으로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는 미술관 관계자의 발화는 이 시간성의 문제가 작동하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Foster, Hal(1996), “Who's Afraid of the Neo-Avant-Garde?”,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Cambridge, MA: MIT Press, pp. 8-13.↩
각 개념의 사용 사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Mörsch, Carmen(2011), “Alliances for Unlearning: On the Possibility of Future Collaborations Between Gallery Education and Institutions of Critique”, Afterall: A Journal of Art, Context and Enquiry, (26): 5-13; 오닐, 폴(2019), 「탈출을 위한 큐레토리얼 레디메이드 형식으로의 전시」,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147-161쪽; 로고프, 이릿(2019), 「연구가 되기」,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41-54쪽.↩